노래하는 순경, 색소폰 부는 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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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병천 아우내은빛복지관에서 작은 음악회를 연 천안동남경찰밴드(천동경찰밴드) 봉사단. 베이스기타를 맡고 있는 이경미 순경이 마이크를 잡고 장윤정의 ‘꽃’을 열창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밴드공연을 보고 박수치는 노인들. [사진 =조영회 기자]

3일 오전 천안시 병천면에 위치한 아우내은빛복지관 대강당에 흥겨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악소리의 주인공은 천안동남경찰서 직원들로 구성된 경찰밴드 봉사단 ‘천동경찰밴드’. 강당을 가득 채운 300여 명의 노인들은 밴드의 연주에 맞춰 박수를 치고 어깨를 들썩였다.

관객들의 연령대가 다소 높은 점을 고려해 첫 곡은 30여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날 보러 와요’로 시작했다. 이날의 레퍼토리는 트롯 이 주를 이뤘다.

강당 한 켠에서 연주를 지켜보던 아우내 은빛복지관 우덕기 관장은 “경찰의 이미지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섬김과 봉사를 한다고 하는 데 실감이 난다”며 “무섭거나 위엄 있는 모습보다는 부드러운 음악으로 주민들과 한결 가까워진 것 같아 흐뭇하다”고 말했다.

음악회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자 이종원(55) 동남경찰서장이 색소폰을 목에 걸고 등장했다. 이 서장은 “어르신들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인사를 한 뒤 색소폰 독주를 했다. 경찰서장이 연주를 한다고 하자 70~80대 노인들은 관심을 집중했다. 비틀즈의 ‘Yesterday’를 완벽하게 연주한 그는 앵콜을 받은 뒤 트롯 ‘갈대의 순정’으로 화답했다. 유기묵(86·여·천안 동면)씨는 “경찰관들의 새로운 모습에 놀랐다”며 “모든 무대가 재미있어 시간가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날 천동경찰밴드 봉사단의 작은 음악회 외에도 치안서비스에 소외된 주민들을 위해 이동경찰서가 운영됐다. 원동기 운전면허시험 등 경찰 민원처리뿐만 아니라 지역 봉사단의 협조로 치과 진료와 이·미용 봉사, 신종플루 관련 검진 등 다채로운 행사를 함께 진행해 의미를 더했다.

◆밴드로 하나 된 우리=아우내은빛복지관 공연준비로 늦은 시간까지 연습하고 있다는 천동경찰밴드 봉사단을 만나기 위해 찾은 것은 1일 오후 7시. 천안동남경찰서(천안 청수동) 지하 음악연습실에는 일과를 마친 밴드 단원들이 모여 연주를 하고 있었다. 24명의 경찰서 직원들로 구성됐지만 이날은 당직과 외근으로 11명의 단원들만이 연습에 참석했다. 악장 김기원(41) 경사는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부터는 매일 2~3시간씩 연습해왔다”며 “단원들이 부서도 각기 다르고 근무 환경도 달라 개인 연습으로 각자 실력을 기른 뒤 합주로 맞춰본다”고 말했다.

공연에서 그 동안 갈고 닦은 색소폰 연주 솜씨를 뽐낸 이종원 천안동남경찰서장.

지난해 12월 30일 동남경찰서의 개서와 함께 결성된 천동경찰밴드는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을 통해 즐거움을 나누고 싶은 직원들이 모여 만들었다. 악기를 잘 다루지 못해도 초빙한 객원 전문연주자에게 레슨을 받을 수도 있다. 본격적인 연습은 김기원 악장의 드럼소리에 맞춰 시작됐다. 중후한 남성들이 드럼 리듬에 맞춰 발을 구르는 모습에서 딱딱한 경찰관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밴드 막내 이경미(여·28·베이스기타) 순경은 경찰에 입문한 지 1년 8개월 된 신참이다. 중학생 때 베이스기타를 배웠지만 고등학교 때 대입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악기와는 멀어졌다. 이 순경은 “경찰관이 되면서 베이스기타를 다시 잡게 됐다”며 “경찰학교 동기들과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다 천안동남경찰서에 발령을 받았는데 밴드동호회가 있어 너무 반가웠다”고 말했다. 이 순경은 “쉬는 시간을 쪼개 연습하지 않으면 업무에 부담이 된다”며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선배들과 어울리고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배우는 게 많다”고 했다.

◆색소폰으로 제2의 인생=이종원(55·색소폰) 동남경찰서장도 멤버로 활동 중이다. 어린 시절 하모니카와 기타를 즐겨 연주했던 이 서장은 6년 전 색소폰을 접했다고 한다. 이젠 색소폰 연주가 취미생활을 넘어 음반을 낼 정도가 됐다. 이 서장은 “경찰관은 업무의 특성상 정서가 메마르기 쉽다”며 “그래서 음악을 통해 따뜻한 감성을 되찾고 그 감성 마인드가 시민들에게 봉사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해 동호회 활동을 권장한다”고 말했다.

천동경찰밴드 결성을 추진한 것도 이 서장이었다. 그는 2004년 충남경찰청 내에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지만 2007년 충남경찰청이 충남과 대전경찰청으로 나뉘면서 밴드가 대전경찰청으로 넘어가 아쉬움이 컸다. 이때문에 동남경찰서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방음시설을 갖춘 음악연습실을 만들었다.

이민택(52·트럼펫) 경위는 “연습 때 틀린 부분, 부족한 파트를 잘 집어내기 때문에 서장님과 함께하는 합주는 늘 긴장된다”며 “이름만 올려놓은 단원이 아닌 실력파 정규 멤버로 공연 레퍼토리도 직접 짜올 정도로 적극적”이라고 했다.

오후 9시가 넘어가자 트럼본과 트럼펫을 연주하는 단원들의 입술은 부풀어 올랐고, 다른 단원들도 손마디가 찌릿한 아픔을 호소했다. 그 때 이 서장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맞춰보고 시원한 맥주 한잔 합시다”라며 단원들을 다독였다. 맹연습에 힘들어하는 단원들을 격려하는 것은 이 서장의 몫이다.

 조민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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