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이블린 글레니 타악기 독주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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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는 타악기들이 펼치는 질펀한 '축제 마당' 으로 바뀌었다.

맨발로 등장한 '여사제 (女司祭)' 이블린 글레니. 그녀는 때로는 성난 외침으로, 때로는 자장가처럼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무대의 열기는 객석 깊숙이 번져 마침내 청중들의 가슴 깊이 불을 지펴댔다.

땅과 하늘, 소음과 음악, 전쟁과 평화의 경계를 오가는 신기 (神技) 의 손놀림을 타고 흐르는 리듬은 폭포수처럼 청중의 귓전을 때렸다.

'소리의 제물' 이 활활 타면서 내는 불꽃처럼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청각장애인 타악기 주자 이블린 글레니의 16일 첫 내한공연 프로그램은 대부분 그가 세계 각국의 작곡가들에게 위촉한 최근작들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곡은 유고 작곡가 네비오사 지브코비치의 '미친 왕의 성 (城)' .금속성 음색이 지배적인 타악기 세트에 성벽처럼 둘러싸여 중국.티벳.타일랜드의 민속음악을 연상하게 하는 '리듬 선율' 을 선사했다.

리듬과 음색은 20세기부터 음악의 전면에 부각된 요소들 아닌가.

또 록음악으로 더 유명한 스페인의 작곡가 자비에 알바레스의 '테마즈칼' 에서 테이프로 재생된 전자음향을 배경 삼아 마라카스를 흔들어대는 글레니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현대음악의 기법이기도 한 '라이브 일렉트로닉스' , 즉 생연주와 테이프 녹음의 놀라운 싱크로나이제이션은 뛰어난 리듬 감각의 소산이었다.

특히 다른 악기에서는 보기 힘든 '음악과 신체' 의 밀접한 관계를 실감했다.

타악기 연주회만큼 CD로 듣는 것과 실제 공연장에서 감상하는 것의 차이가 큰 공연이 어디 있을까.

아이슬란드 작곡가 아스켈 메이슨 (46) 의 스네어 드럼 독주곡은 스틱으로 북의 어떤 부위를 내려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음색을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 집요하게 반복되는 리듬으로 최면을 걸었다가 깨우고 마는 익살맞은 곡이었다.

또 '드럼 송'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프럼' 에서는 양손과 발까지 동원해 겹겹이 얽힌 리듬의 실타래를 정교하게 풀어나갔다.

레이 스티븐스의 마림바 독주곡 '리듬의 카프리스' 에서 글레니의 양손에 들려 있는 4개의 스틱이 춤을 추는 모습은 공을 던지고 받는 고난도의 곡예나 다름 없었다.

평범한 작품도 연주자의 역량에 따라 명곡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준 연주회였다.

살아있는 작곡가들의 작품만으로 꾸며진 프로그램이라 생생한 감동과 충격은 더욱 컸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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