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조부가 쓴 ‘자유주의자의 수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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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호 35면

하토야마 유키오 차기 일본 총리는 자민당 54년 체제를 깨부쉈다. 하지만 1955년 보수대연합으로 ‘만년 집권당’ 자민당을 만든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재임 1954년 12월~56년 12월)다. 역사적 아이러니다.

‘정치 개혁자’ 라는 점에서는 조부와 손자 사이에 분명 같은 DNA가 있다. 패전 후 미·일 강화조약으로 미국에 안보를 맡긴 요시다 정권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하토야마 정권은 ‘반미’ 또는 ‘탈미’를 들고 나왔다. 또 요시다가 싫어했던 계획경제를 지지해 55년 1월 ‘경제자립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미국의 원조와 전쟁 특수에 의존하지 않고 연 5%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자주국방을 위해선 군대 무장을 해야 한다며 헌법 개정을 주장하다 취소한 일도 있다.

그는 패전 후 소련에 억류된 일본군의 귀환과 유엔 가입(소련의 반대가 걸림돌)을 위해 일·소 공동선언을 체결했다. 할아버지 하토야마는 뿌리 깊은 반(反)관료주의자였다. 1936년 중앙공론 1월호에 ‘자유주의자의 수첩’ 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관료주의를 질타했다. “관료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관권을 행사하고 싶은 피가 흐르고 있다. 세상의 어려움도 모르고 경험도 일천하다. 충실한 공복이 돼야 하는 본분을 망각한 채 민간 사업자, 상인, 농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관료와 정당의 담합으로 의회정치가 망가지고 있다.”

이는 하토야마 차기 총리가 총리실에 최고 정책결정기구로 ‘국가전략국’을 만들고, 거기에 국회의원들을 100여 명 포진시켜 이른바 ‘관료내각제’를 벗어나겠다는 구상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국가전략국 설치는 예산과 외교를 총괄해 사실상 재무부(옛 대장성)와 외교부를 무력화시킴을 뜻한다. 게다가 관료 정책 결정의 하이라이트인 차관회의를 없애고 다선 의원 위주로 구성된 장관회의를 사안별로 열어 정책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많은 정보를 장악하고 분석에도 능한 관료집단을 국회의원들이 이길 수 있느냐에 정권의 성패가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 초기에는 당이 세고 정부(관료)가 낮은 자세를 취하는 ‘당고정저(黨高政低)’의 모습을 보이다 정권 후반으로 가면 뒤집히는 현상이 상식화돼 있다. 작가 출신의 사카야 다이치 전 경제기획청 장관은 올해 일본 정치의 키워드를 ‘변(變)’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관료 지배 타도의 찬스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경제뿐 아니라 외교·의료·교육이 나빠지고 저출산·고령화, 지방경제 쇠퇴, 국제경쟁력 저하, 자살 증가 등으로 국력이 저하되는 원인이 모두 관료사회에 있다는 지적이다.

손자 하토야마가 주창하는 ‘우애’ 는 결국 아시아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 역시 조부를 뒤따르는 것이다. 할아버지 하토야마는 “장래의 일본은 청년들에 달려 있다”며 ‘우애청년동지회’를 만들었다. 쿠덴호프 칼레루기 박사의 우애운동과 세계연대의 아이디어에 공명해 세계연대의 평화사상을 생각해 냈다. 이는 지금도 일본 청년운동의 정신으로 살아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의 관전 포인트는 크게 ▶미국과의 관계 변화(탈미) ▶국제협력과 역할(우애) ▶확실한 의원내각제 실행(탈 관료)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일본 사회는 민주당 정권에 대해 메이지유신과 같이 모든 제도를 파괴하는 대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짚을 대목이 있다. 하토야마 체제의 권력구조다. 정권 창출의 주역이며 상왕 격인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대표대행, 인기 발군의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 예비 총리로 평가받는 간 나오토 대표대행 등의 집단지도체제가 과연 잘 운용되느냐다. 할아버지 하토야마가 보수연합을 성사시킨 뒤 당 대표를 정하지 못한 채 한동안 4인 지도체제로 나가면서 정권이 불안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다행히 ‘진무(神武)경기’라는 대호황이 이어져 정치불안이 큰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가 뒷걸음질치고 실업난이 가중되는 터라 정치불안으로 경제가 더 악화된다면 새 정권의 추진력은 급격히 저하될 것이다. 이중(二重) 권력구조를 차단해야 한다는 얘기는 바로 그런 연유에서 나온다.

시대는 변했고 변한 시대는 하토야마 유키오 편에 서있다. 일본은 공기(空氣)의 정치다. 공기는 여론이고 민심이며 현장이다. 이 공기는 변덕이 심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 일본 국민들은 그가 KY족(구키 요메나이: 공기를 못 읽는 부류)에 끼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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