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변절할 줄 아는 대통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큰 위기를 맞은 나라의 지도자에게는 위기해결을 위해서라면 확신을 갖고 신봉하던 사상을 과감하게 바꾸고, 때로는 지지세력과도 결별하는 도덕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브라질 대통령 페르디난도 카르도소가 그런 지도자다.

카르도소는 중남미 좌파 지식인의 대표요, 종속이론의 대부였다.

종속이론은 수입장벽을 높이 쌓고, 국가경제를 폐쇄적으로 운용하고, 시장을 조소하는 노선이다.

그는 군사정부를 피해 해외로 망명했다가 귀국해 93년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그때 브라질 경제의 참상은 인플레 7천%, 외채 8백70억달러가 잘 설명해 준다.

재무장관 카르도소는 민영화와 정부지출 삭감, 세금징수 개선, 지방정부 보조금 삭감, 레알화 달러연동의 개혁을 단행했다.

무역과 투자가 늘고 인플레는 한달 안에 10% 아래로 떨어지고 초인플레의 피해자였던 빈곤층과 노동자들의 고통이 가벼워졌다.

종속이론의 대부에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기수로 '변절' 한 카르도소는 경제안정의 영웅으로 94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도 과격한 변신으로 경제를 살린 지도자다.

그는 페론주의자로 군사정권의 박해를 받아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페론주의는 기간산업에서 나이트클럽까지 국유화하고, 경제적 쇄국정책을 쓰고 잘 길들여진 노동조합의 지지로 권력을 유지하는 극단적 대중주의 (populism) 다.

89년 페론주의 정당의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메넴은 취임 즉시 신자유주의자로 돌았다.

페론주의를 팽개치고 민영화와 개방, 노조활동의 정상화에 성공해 6천%의 인플레를 한자릿수로 내리고 평균 5% 이상의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다.

그를 지지한 계층이 당장은 개혁의 피해자였다.

신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카르도소는 왼쪽으로, 메넴은 오른쪽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개혁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중도쪽으로 U턴을 해야 했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도 경제위기 해결이라는 도전 속에서 대통령이 됐지만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카르도소나 메넴 같이 혁명적으로 노선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러나 카르도소와 메넴이 개혁을 위해 전자는 좌파논리와, 후자는 페론주의와 결별한 것과는 달리 金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세력에 대한 애착을 못 버리고 있다.

노동정책이 그렇다.

대선에서 블루칼라의 다수가 그를 지지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金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여론정치를 강조한 것도 대중주의로 들린다.

이해와 시류 (時流)에 따라 바뀌는 중론 (Popular opinion) 과 여론 (Public opinion) 이 혼재한 정치풍토에서 여론에 너무 민감하면 결단력을 잃는다.

경제회생이 절대절명인데 노동계 일각에서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중단을 요구한다.

기업은 기업대로 강요된 빅딜에 불만을 갖고 시간을 끈다.

노사정은 기능마비에 빠졌다.

金대통령은 자신의 중요한 지지기반의 하나인 근로계층과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할 시점에 온 것 같다.

대통령의 권한은 마음만 먹으면 거의 못할 게 없을 만큼 막강하다.

개혁의 지지부진을 이해 당사자들의 저항 탓으로만 돌릴 수 없을 만큼 그렇다.

만성적인 영국병을 고친 마거릿 대처도 '철의 나비' 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의 당헌을 고쳐 절대적인 지지기반인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했다.

金대통령은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면 지지세력과의 인연을 끊고, 정권 재창출의 미련을 버리고 혼란에 빠진 정치와 실책을 반복하는 정부를 바로 세우는데 확실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한국의 폴리티션으로 성공한 그에게 한국을 뛰어넘는 경세가 (經世家 : Statesman) 로 도약할 야망이 있다면….

김영희 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