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65.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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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7장 노래와 덫

김사장은 하룻밤 묵어가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주문진으로 돌아가는 발길을 재촉하고 말았다. 그렇고 보면 주문진에 정착한 이후 심기가 울적할 때마다 발길은 저절로 김사장을 찾아가곤 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삶에 지치고 시달리는 사람을 정교하게 감싸주는 위안이 있었다. 지난날에 경험했던 직장의 상사들 중에는 간혹 지금의 김사장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헐벗은 노점행상의 처지로 만난 사람 중에서 김사장같이 심성이 무던하면서도 경위 바른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그에게는 왠지 고개가 숙여졌다.

지난 번 사건 때 2천만원을 구걸하려고 동분서주했으면서도 김사장만은 찾지 않았던 것은, 사정을 얘기하면 군소리 없이그 돈을 변통해 줄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군말하지 않고 돈을 변통해 준다는 그 자체가 오히려 두려웠었다.

변씨의 사건을 더 이상 채근하고 들지 않았다는 것은 그런 속내까지도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하룻밤 묵을 동안 내막을 헤집고 들까 두려웠던 두 사람은 일정이 바쁘다 핑계하고 서둘러 덕장을 떠나고 말았다. 김사장도 더 이상 붙들지는 않았다.

"김사장 배려로 봄철에 팔아먹을 황태는 확보가 되겠지만, 동해어장 텃밭이 위협당하면 우리 역시 건어물 행상으로 견뎌내기가 손쉽지 않겠어요. 필경 가격파동을 겪을 테지요. "

"한선생 요즘에 고로쇠 약수가 천세난다는 말 들어 봤어?" "고로쇠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이 사람 몸에 고인 노폐물을 배출시키고 신경통이며 여성들 피부미용에도 약효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

"마침 행중이 하동으로 내려가 있다니 말인데…. 한철 동안 지리산 고로쇠 약수를 취급해보는 것은 어떨까? 매년 이맘때면 고로쇠 약수를 채취한답시고 지리산 뱀사골이며 달궁계곡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든다던데? 땀을 흘려가며 한 말을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아 짭짤한 명태나 오징어를 곁들여 마시고들 있다는구만. 하동이나 구례장터에서 고로쇠 팔고 오징어도 판다면 일거양득 아닌가?"

"연세값 하느라고 궁합은 아래 윗니 맞추듯 잘 맞춥니다만, 우리 같은 뜨내기 행상들은 범접도 못해요. 고로쇠가 밑천 없이 장사된다는 것을 시골사람들이라고 모르고 있을 법 합니까. 벌써 번영회다, 영농조합이다 해서 수액이 허튼 행상들에게 분산되지 않도록 닦달한 지 오래 되었어요. 풍년기원제는 물론이고 약수 먹고 고함 지르기 같은 행사까지 벌여 구례와 남원의 관광상품으로 포장을 해 두었어요. 장성의 백암산이나 광양 백운산에서 생산되는 고로쇠도 그 지방에서 고유상표를 붙여서 팔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

"큰일났구만. 고등어도 한시절 끝물나 갈 판국인데…. " "황태가 출하될 때까지는 오징어로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전라도로 가면 갯벌에서 생산되는 먹거리가 많겠지요. 강원도의 산나물을 전라도에서 팔아보는 것도 좋겠지요. "

"미안하이. 내가 저지른 일로 행중 모두가 고초를 겪고 있다는 것이 병이 되고 말았는지, 그 생각만 나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여 벌떡 일어나 앉을 때가 많아. "

"부담 갖지 마세요. 빚은 졌지만, 한두 달 안에 청산할 것입니다. 행중에 어느 누구도 형님을 밉상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정도에 수습이 된 것도 다행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두 번 다시 거론할 건덕지도 없구요. "

"나도 짐승이 아닌 이상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나. 그 돈이 어떤 돈인가.

장바닥 깡추위에 사추리가 꽁꽁 얼어붙어도 허드렛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가며 산비알 기어오르는 노루 쫓기듯 뜨내기 행상으로 벌어들인 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솔직한 말로 나 같은 인생 자결이라도 해야 그나마 체면유지가 될 것 같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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