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 전문가 시대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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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계경제연구원과 한국증권거래소가 15일 공동 주최한 조찬 모임에서 생긴 일이다.

이날의 초청 강사는 리처드 그라소 뉴욕증권거래소 (NYSE) 이사장. 그는 NYSE에서만 30년을 보낸, 말하자면 '주식매매시스템' 의 베테랑인 셈이다.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일은 질의.응답 시간에 일어났다.

미국 주가를 예측해 달라는 주문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다우지수가 사상 처음으로 10, 000을 넘을 태세이니 이해는 가지만 한마디로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증권거래소 이사장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주식시장을 예측하는 투자전략가나 기술분석가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라소 이사장은 주가를 예측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Y2K (컴퓨터 2000년도 인식오류 문제) 준비상황이 어떠하냐" "사이버거래가 보편화되면 거래소와 같은 구시대적 산물이 살아남을 여지가 있는가" 등은 흔쾌히 답할 것이 분명하고 듣는 사람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뉴욕 월가의 어느 이코노미스트에게 "다우지수 연말 목표를 얼마로 보느냐" 고 물으면 "그건 내가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고 완곡하게 사양하겠지만 속으론 "이런 무식한 사람 보았나" 하면서 경멸할 것이다.

국내 투자펀드를 관리하는 펀드매니저에게 신흥시장에 관해 물으면 그 역시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답을 피할 것이다.

이것이 전문가가 행세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소위 전문가 시대가 왔다고 떠들어대는 우리 현실은 어떤가.

아무라도 붙잡고 아무 질문이나 던져 보라. 한국경제의 장래, 주식시장 예측, 환율전망 등 기다렸다는 듯이 척척 대답할 것이다.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모두 무식한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전문가가 되기를 희망할까. 우리가 IMF를 당하고 가장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가 전문가의 부족이다.

10년 또는 20년 오직 한 분야에 종사, 시간과 공간을 꿰뚫는 진짜 전문가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전문가는 전문가를 알아보는 사회에만 존재한다.

권성철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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