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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3. '또 하나의 문화' 그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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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그바람은 80년대 들어 불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의 완고한 획일의 벽을 깨는 여성들의 색칠작업. 바로 '또 하나의 문화' (이하 '또문' ) 였다.

답답함과 어두움이 우리 사회를 짙게 드리우고 있을 때 '또문' 은 대안 (代案) 문화라는 기치를 들고 84년 처음 전면에 나섰다.

이에 앞서 미국에서 사회학.인류학을 전공한 젊은 여성학자들이 70년대 말 속속 귀국하고 있었다.

조형 (趙馨.56.이대.사회학). 조은 (曺恩.53.동국대. 사회학) 교수. 조한혜정 (趙韓惠貞.51. 연세대.사회학). 조옥라 (趙玉羅.49. 서강대. 사회학) 등 조씨 4인방과 정진경 (鄭眞卿.45. 충북대. 사회학) 교수는 처음엔 각자 학문적인 필요에 의해 조우했다.

하지만 이들이 만나면서 공통의 화제가 된 것은 여성으로서 답답한 사회의 점진적 변화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었다.

'또문' 동인지 1회 편집동인인 이들에게 그것은 마치 새로운 문화에 목마른 사람들이 모여 벌인 '문화의 샘물파기' 였다.

"우리가 지향한 가치는 '자율' 과 '공생' 이었어요. 일사분란한 국민동원체제로 굴러온 타율사회에서 자율을 꿈꾸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모독적 행위였지만 답답함에 못이겨 분신하는 대학생들이 생겨나던 때 금기시된 단어들을 내걸고 시작한 모임이지요. " 조한혜정 교수는 '또문' 의 출발을 이렇게 말한다.

결혼.교육.청소년 등 생활 속에서 '이것만이 아니다.

저것도 가능하다' 는 새 시각을 제공해 온 '또문' 의 성장기는 87년 출판사 설립과 91년 출판사가 펴낸 '새로 쓰는 사랑 이야기' 와 '새로 쓰는 성이야기' 를 출간했을 때다.

'또문' 이란 이름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된 '새로 쓰는…' 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던 작품. 각각 3만부 이상이 팔린 이 책들은 연세대.이화여대 등 다수의 대학에서 '한국 사회의 성' 에 대한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창립동인 중 언니격인 조형 교수는 "책 출간과 소모임 등을 통해 이루어 낸 것이 대안문화의 인식 확대" 라며 "성이란 숨겨야 미덕이라는 기존 관념에서 따뜻하고 정겨운 언어로 얘기될 수 있다는 의식, 결혼한 여자는 참는게 모든 것인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목소리도 있다는 것 등을 보여주었다" 고 말한다.

실제로 '또문' 이 국내 여성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각별하다.

출범 당시부터 여성운동을 민주화운동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중심이슈로 내세운 첫 단체였다.

또 여성평우회에서 이어진 여성민우회가 노동문제와 대중을 지향한 실질적인 작업을 이뤄낸 곳이라면 '또문' 은 중산층 여성들 혹은 대졸여성 지식인들이 모여 이론의 토대를 공급하는 '담론발전소' 같은 기능을 한 곳이다.

'또문' 의 김기화 (金起和) 사무차장은 "이런 배경 탓에 지나치게 엘리트 중심적, 서구적이란 지적을 받기도 했다" 고 말한다.

창립 후 15년이 지난 지금, '또문' 의 핵심인 4명의 조교수는 그 위상을 바탕으로 현정부의 주요 프로젝트들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펴가고 있다.

'탈식민지적 지식인' 을 강조, 지적 흐름의 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조한혜정 교수는 청소년 문제에 천착한 이후 최근 문화관광부 청소년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다.

조형 교수는 2기 노사정위원회 위원으로, 조은 교수는 21세기 여성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또 도시빈민과 농촌여성문제에 관심을 쏟은 조옥라 교수는 한국도시연구소와 여성농민연구소에서 맹활약을 보이고 있다.

이들 외에 장필화 (張必和.이대.여성학).이상화 (李相華.이대.철학).김은실 (金恩實.이대.여성학) 교수 등도 '또문' 창립시기부터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온 이론그룹의 실세들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학연이나 지연 등 남성집단에서 유행하는 파벌 혹은 조직을 거부했기에 대표자를 한번도 두지 않았던 '또문' .그러나 이곳의 유일한 학연이자 외부조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이대 대학원 여성학과이다.

창립 당시 1호 편집동인 5명과 장필화 교수 등이 팀을 이뤄 '가부장제 사회' 란 과목을 강의했고 당시 학생이자 '또문' 실천그룹의 대표격인 여성운동가 박혜란 (朴惠蘭).오숙희 (吳淑姬).김효선 (金孝鮮.여성신문 편집부장) 씨 등이 이곳에서 만난다.

인기듀엣 패닉 멤버인 '이적의 엄마' 로 더 잘 알려진 박혜란씨는 서울대 독문과와 대학원을 수료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10년간 전업주부로 지냈다.

84년 막대아들의 목에 아파트 열쇠를 걸어주고 이대에 진학하며 여성운동가이자 여성학자로 변신한 그는 최근 잇달아 책을 출간하는가 하면 '여성신문'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숙희씨는 다양한 방송활동과 탁월한 언변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한국여성민우회 김포지부 대표로 있으면서 강연과 방송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대학원 시절부터 '또문' 에 참여한 김은실 교수는 " '또문' 을 풍요롭게 하고 그 이념을 글이나 작품으로 승화시켜낸 예술그룹 또한 '또문' 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며 "특히 91년 작고한 시인 고정희 (高靜熙) 씨는 창립 멤버로 작고전까지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한 '또문' 의 대표적 예술인" 이라고 말한다.

'하나코는 없다' '회색눈사람' 등으로 친숙한 소설가 최윤 (본명 최현무.서강대.불문학) 교수도 또문 초기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펴 '또문' 의 예술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시집 '또다른 별에서' 등으로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인 김혜순 (金惠順.서울예대.문창과) 교수도 90년대초기 합류한 '또문' 의 멤버다.

이밖에 화가 윤석남 (尹錫男) 씨, 사진작가 박영숙 (朴英淑) 씨 등도 '또문' 을 살찌운 예술가들이다.

비조직화를 지향하던 '또문' 은 지금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앞으로 사무국을 맡을 이소희 (李昭晞.한양여대) 교수는 "외부적으로 공신력을 확보하고 대중적 영역을 강화해 대안문화의 확산과 전파를 더욱 가속화시키려는 의지의 표현" 이라며 21세기 '또문' 의 비전을 내보인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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