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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일왕의 전쟁 책임에 면죄부 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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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일본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1945년 9월 히로히토 일왕을 불러 회담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는 1945년 8월 29일부터 51년 4월 11일까지 ‘가이진 쇼군(外人將軍)’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전후 일본의 밑그림을 그린 일본 점령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부임 직후 재벌의 해체와 육·해군성 폐지를 단행하고, 평화헌법을 만들어 군국주의 체제를 해체해 나갔다. “전후 일본인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개혁을 행했습니다. 불굴의 의지, 배움에의 열망, 그리고 놀라운 흡수력을 보인 그들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이라는 저 높은 고지를 향해 헌신하며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아가 정치 도의의 진전, 기업 활동의 자유, 그리고 사회정의에 봉사하는 진정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를 창출해냈습니다.” 51년 4월 19일 그는 이임 연설에서 일본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음을 천명했지만, 실상 일본의 전후 청산은 철저하지 못했다.

그는 점령 직후인 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일왕을 공사관으로 불러 접견했다. 군부와 재벌과 함께 일본 군국주의의 중심축이었던 일왕은 비록 ‘살아 있는 신(現人神)’에서 ‘인간’으로 격하되기는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 살아남았다. 47년 중국 국민당이 공산주의자에게 그 기반을 잠식당하자, 이듬해 11월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는 소위 ‘역코스(reverse course)’로 알려진 점령정책의 전환이 있었다. 재벌기업 자회사 폐지 계획은 흐지부지되었으며, 극동 군사재판은 침략전쟁의 주역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그때 미국은 점령정책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이 있을 경우 ‘일본 국민 자신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개혁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49년 중국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 가고 50년 한반도에 전쟁이 터지자, 전범자는 죗값도 치르지 않고 정계에 복귀했다. 일본은 51년 미군 주둔을 허용하고 미국의 전략체제 속에 일본을 종속시키는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맺는 대가로 이듬해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립을 얻어냈다. 54년 방위청이 세워지고 자위대라는 미명 하에 다시 무장했으며, 이듬해에는 평화헌법 개정을 당헌으로 내건 자민당이 집권했다. 풀뿌리 일본 시민사회의 선택으로 54년 만에 정권을 바꾼 민주당 정부가 그간의 ‘역코스’에 어떠한 제동을 걸지 못내 궁금하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