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지나쳐 가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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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풍랑이 거칠던 어느 날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밀려나와 몹시 난처하게 됐다. 물고기는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물 속에 되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첫번째 사람은 급한 일로 바삐 가는 길이라고 지나치고, 두번째 사람은 도와주자니 또 다시 밀려나와 허우적거리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며 갈등하다 지나쳐 버렸다.

세번째 사람은 물고기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은 어느 정도 물고기의 탓일 수 있다고 말했다.

만일 누가 매번 물고기를 도와주다 보면 고치기 어려운 의존심만 키우게 될지도 모른다며 지나쳐 갔다.

그러는 동안 물고기는 점점 기운이 빠져 숨을 거두었다. "

인도주의의 기본을 가르치고 있는 에드 설리번의 이야기다.

북한에서는 지금 많은 생명들이 기만과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북한처럼 폐쇄된 사회에서 정확한 정보를 캐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탈북자들과 북한을 방문한 국제기구 및 종교.시민단체 대표들이 전하는 북한의 참상은 더 이상 우리가 외면할 수 있는 구실을 주지 않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귀가 따갑게 들어온 북한의 식량난이 이제는 그 정도를 지나 금세기 말 최악의 기아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식량계획 (WFP) 의 평양대표부 소장 데이비드 모튼은 북한의 기아상태가 1980년대 처참했던 에티오피아 수준까지 악화됐으며 앞으로 최소한 3년간은 대규모의 식량원조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WFP.유엔아동기금 (UNICEF) 등 국제기구들이 북한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영양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아동의 62%가 영양실조로 발육부진 상태며 (아시아 최하수준) , 16%는 극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북한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약 3백만명의 북한동포가 기아로 숨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숫자는 캄보디아나 아프리카의 식량난때 희생된 사람들보다 많은 숫자며 1950년대 마오쩌둥 (毛澤東) 의 대약진운동 실패로 중국 전역에서 굶어죽은 사람수와 비등한 규모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식량을 찾아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머무르고 있는 북한인들의 수가 10만명에 달하고 있으며, 주린 배를 채우려 인신매매.살인.식인사건까지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기할 만한 일은 영국의 더 타임스, 헤럴드 트리뷴 등 좀처럼 개인 의견을 밝히지 않는 신문들의 일선기자들마저 북한주민을 도와야 한다고 세계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더 이상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북한 정부 및 지도자들의 정책적 전략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으며 한시라도 군사적 경계태세를 소홀히 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사의 큰 비극이 북한 땅에서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햇볕정책을 국민운동으로 발전시켜 북한동포들을 도와야 한다.

이는 인도주의와 동포애로 머지않은 통일 후의 민족화합을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금강산 유람의 다음 단계는 시민들의 이니셔티브일 것이다.

전국의 교회.사찰들이 북한의 마을을 하나씩 맡아 돕고 시민단체들이 구호품과 식량을 전달하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다.

북한을 돕는 것은 또한 남북간의 실질적 평화.협력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많은 북한 전문가들이 식량난과 경제파탄으로 약해지는 북한이 반드시 군사적으로 덜 위험한 존재가 되리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민족의 자존심과 어린이들의 건전한 교육을 위해서라도 북한동포들을 도와야 한다.

이유는 어떻든, 국제사회에서 인식되는 한국의 인상은 북한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의 원조에도 인색하다는 것이다.

동포들의 고통과 죽음에 무관심한 어른들을 보며 자라는 우리 어린이들이 포괄적인 윤리와 도덕성이 강조되는 지구촌에서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지 자문해 봐야 한다.

WFP를 비롯한 여섯 유엔기구들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북한개발원조금은 올해 3억달러 선으로 책정돼 있다.

지난해까지는 미국과 스칸디나비아국들이 주로 이러한 계획들에 재정지원을 했다.

햇볕정책을 내건 우리 정부가 올해에 이러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주도하면서 민간단체들의 대북 원조활동도 함께 이끌어가야 한다.

모래사장으로 밀려나온 물고기를 먼저 물 속에 넣어줘야 한다.

그리고 그후에 이유를 따져도 늦지 않으리라.

구삼열 유니세프 총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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