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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기반산업으로 부활하는 도시] 1. 보스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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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변해야 산다.

국가든 도시든 흥망과 성쇠 (盛衰) 는 변화를 선도하느냐, 변화에 휩쓸려 낙오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구촌 곳곳에는 IMF 체제하의 한국 못지않은 시련을 맞고도 좌절하지 않고 새 길을 뚫어 당당히 부활에 성공한 도시들이 있다.

낡은 사고.시설을 걷어내고 21세기형 첨단 지식산업으로 일찌감치 탈바꿈한 세계 도시들을 생생한 현지취재로 소개한다.

[뉴욕 = 김동균 특파원]보스턴 일대의 첨단 벤처산업 단지엔 '루트 (Route) 128' 이란 별칭이 붙어 있다.

대부분 업체들이 보스턴시 외곽 순환도로인 128번 도로를 따라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차를 몰고 128번 도로에 들어서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량한 야산과 겨울나무 뿐이었다.

'도대체 뭐가 첨단 하이테크 단지라는 거야' 라는 가벼운 실망감은 출구를 빠져나가 지선 (支線)에 접어들면서 곧 사라졌다.

'오피스 파크' 라 불리는 3~4층 높이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 촘촘히 입주한 컴퓨터 관련업체들은 외견상 오피스룸 몇개, 고용인원 몇십명 규모에 불과한 '구멍가게' .그러나 거대 장치산업도 따라올 수 없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다윗들의 동네' 다.

*** 128번 도로따라 '오피스 파크'

전자상거래 (EC) 안전시스팀 업체인 N*ABLE도 이중 하나. 이 회사는 MIT 및 스탠퍼드대를 나와 컴퓨터칩 제조업체인 인텔과 덱 등에 근무하던 20~30대 젊은이 6명이 96년 창업했다.

이들은 인터넷상거래 시대의 본격 개막을 앞두고 사람들이 자신의 신용카드 번호가 사이버 공간에 노출되는 것을 우려하는 데 착안, 이를 암호화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키보드 등 컴퓨터 하드웨어에 카드를 판독하는 홈을 만들어 칩이 내장된 스마트 카드를 긁으면 신용정보가 암호화한 상태로 사이버 공간을 통과, 신용안전을 확보한다는 내용. 아이디어만 있을 뿐 맨주먹이던 이들은 바로 보스턴 지역의 창업투자사 CSP를 찾아가 자금을 끌어들였고, 곧 이어 체이스 맨해튼 등을 대주주로 참여시켰다.

98년 라스베이거스 컴덱스쇼에 관련장치를 출품, 관계자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본격적으로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지난해 가을부터.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에서 "앞으로는 하드웨어 차원에서 칩을 읽어들이는 컴퓨터구조로 가야할 것" 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장차 모든 컴퓨터가 이 장치를 달아야 하는 '엄청난 상황' 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현재 투자동참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삼성SDS가 현지의 CTE사와 공동 설립한 CSP 이계식 (李啓植) 대표는 "앞으로 2년 내에 증시상장을 노리고 있는데 상장되면 투자금액의 10배를 회수할 가능성이 있다" 고 말했다.

매사추세츠 소프트웨어 카운슬의 통계에 따르면 98년 현재 이 일대의 벤처기업 수는 2천7백51개, 고용인원은 13만1천5백명이다.

스프레드 시트로 대표되는 로터스, 인터넷 검색엔진인 라이코스, 인터넷상거래용 소프트웨어 전문업체인 오픈마켓 등이 대표적 업체들. 전체 매출액은 약 92억달러다.

*** 작년 2천여社 매출 92억弗

10년전에 비해 3배 이상 커진 규모. 벤처캐피털사인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즈에 따르면 98년 3분기 보스턴을 중심으로 뉴잉글랜드 지역에 투자된 벤처캐피털은 5억5천1백만달러로 미국 전체 투자액의 14.6%에 이른다.

실리콘밸리 (12억4천5백만달러) 엔 뒤지지만 전년 동기 대비 1백38%가 늘어나 실리콘밸리 증가율 (28%) 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성장세를 자랑하고 있다.

벤처기업이 '돈줄' 역할을 하는 덕분에 보스턴 일대의 경기도 되살아나고 있다.

보스턴 시내 한복판엔 대형 도시재개발사업까지 한창 진행 중이어서 활기를 띠고 있다.

보스턴 지역은 첨단 벤처산업이라는 꽃을 활짝 피우기까지 '2전3기' 의 우여곡절을 거쳤다.

원래 이곳은 1950년대말까지 섬유.가죽산업의 중심지였다.

워낙 노동인구가 많았고, 뉴햄프셔 쪽에서 발원해 이 일대를 지나는 크고 작은 강들은 낙차가 커 수력발전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미 최대의 플리스 생산업체 맬던 밀을 비롯해 수십개 섬유업체가 지역경제를 이끌어 갔다.

지금도 우스터엔 미 최초의 여공 기숙사가 남아 있고, 로웰엔 미 직물역사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섬유산업이 사양기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지역내 섬유.가죽업체의 90%가 싼 노동력과 저렴한 수송비를 찾아 펜실베이니아.조지아.노스캐롤라이나주 등 남쪽으로 이동했고, 보스턴 일대엔 돈 구경하기가 어려워졌다.

" 3대째 직물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짐 질레트 (61) 맬던 밀 관리담당 부지배인의 회고다.

*** 50년대 말부터 섬유산업 몰락

한물 간 듯했던 보스턴이 다시 활기를 띤 것은 60년대 후반부터. 새로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컴퓨터.바이오테크.방위산업 업체들이 숙련된 노동력과 뉴잉글랜드인 특유의 성실성, 주정부 차원의 기업유치 노력 등에 힘입어 다시 몰려들었다.

특히 중대형 컴퓨터를 앞세운 컴퓨터산업이 번창했다.

차세대 IBM이라 불렸던 왱 컴퓨터, 최근 컴팩에 넘어간 디지틀, 프라임 컴퓨터.데이터 제네럴 등 미국내 전체 컴퓨터 업체의 70% 이상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소형 개인용 컴퓨터 (PC)가 대형 컴퓨터를 시장에서 밀어내면서 지역 경제기반은 또 다시 급격히 허물어졌다.

퍼스트 내셔널 뱅크 오브 보스턴의 스티브 그린 수석부사장은 "자고 나면 기업들은 문을 닫았고, 해고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경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했다" 고 당시의 악몽을 되새겼다.

그러나 '보스턴판 IMF사태' 는 90년대 초반들어 오히려 지역경제 부활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망한 회사에서 흩어져 나온 수많은 기술인력들이 저마다 소형 벤처기업을 창업하면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실리콘 밸리조차 아직 본격적으로 손대지 못하던 정보통신 쪽이 주방향이었다.

벤처기업 돈줄… 재개발 한창 벤처기업들은 작은 덩치의 이점을 이용, 재빠르게 변화를 주도했다.

수없이 새로 생기고 수없이 망하면서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모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터넷의 상용화는 이같은 추세에 기폭제로 작용했다.

매사추세츠 소프트웨어 카운슬의 데이비스 블롬 회장은 "극적인 부활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형태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적응할 수 있게 돕는 지역분위기와 인프라 덕분" 이라고 말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보스턴무역관 김태형 (金兌亨) 관장도 "창업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어 한국의 벤처기업들이 진출해 뿌리내리기에 용이한 곳" 이라고 설명했다.

산학협동이 잘되고, 산업간 네트워크가 활짝 열려 있는 것도 이 지역의 장점. 정기적으로 'MIT 벤처포럼' (MIT대). 'WPI포럼' (우스터 공대) 등이 열려 기업인.창업희망자.벤처캐피털 관계자.각 대학 및 협회관계자 등이 난상토론을 벌인다.

96년 창업된 웹라인이란 소프트웨어 회사는 그해 5월 MIT 벤처포럼이 주최한 '창업계획서 경연대회' 에서 한 MIT 재학생이 1등 한 것을 계기로 탄생된 회사다.

그는 당시 받은 상금 5만달러를 밑천으로 회사를 차렸는데 지금까지 1천만달러 가까이 투자를 끌어들일 만큼 급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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