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쉬리'돌풍 좋아만 할일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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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영화 한 편이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효과 한가운데 우린 놓여 있다. 한국 영화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영화산업에 활력을 넣으리라는 기대, 대기업 자본이 동원될 만한 동기가 부여됐고 장르 개척이 한결 수월해지리라는 예측과 논평이 연일 PC통신을 메우고 언론 방송을 오르내린다.

'쉬리' 가 개봉 열 하루만에 전국에서 1백10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는 소식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스크린쿼터 존폐 문제로 한동안 뒤숭숭한 나날을 보낸 영화인들에겐 희망을 주는 낭보이며, 우리 영화의 연간 제작편수가 불과 40여편으로 축소된 현실에 비추어서도 다행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이렇게 거창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수많은 대중이 설 연휴의 어느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면 그것만으로도 '쉬리' 는 칭찬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쉬리' 가 큰 성공을 거둔 배경은 무엇일까. 제작비를 댄 기업의 대대적인 홍보와 언론의 전폭적이라 할 만한 '지원사격' , 연휴특수. 이런 외적 배경과 함께 멜로드라마에 식상한 관객과 규모가 큰 액션드라마에 목마른 관객의 욕구를 적극 수용한 소재와 전개과정의 역동성, 박진감 넘치는 볼거리, 한석규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의 관객 유인력이 안정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 등이 이유가 될 듯 싶다.

그러나 '쉬리' 가 가져온 공과 미덕, 타고난 복된 운명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내 눈에는 이 현상이 그렇게 즐겁게 비치지만은 않았다.

작품의 질과 수준, 고민의 밀도에 대한 평가에는 확실히 거품이 있으며 그것은 한국영화를 미학적으로나 산업적으로 발전시키려는 태도에서 매우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야박하게 쿤데라 식으로 말한다면 '쉬리' 는 부도덕한 영화다. 존재의,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다른 면을 찾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안타깝다. 액션은 다른 우리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감하고 정교했으나 이야기의 뼈대는 앙상하고 더러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

도입부, 북한 8군단 침투조의 훈련과정은 인간이길 포기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소수의 반란군이란 설정을 넘어 북한의 대표성을 띠어가는 그들은 영화 내내 야만적 살인마로서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남북한 화해 분위기를 해치는 것은 박무영 일당이 아니라 오히려 '쉬리' 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구성은 정확히 말해 치밀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방어적이다. 이방희를 둘러싼 몇 가지 복선은 변명을 위해 마련된 것에 불과하다. 남남북녀의 이별은 깊이도, 절제도, 고통도 없는 감상이다.

닫힌 인간과, 교과서적인 역사의식, 경직된 현실인식. 한 마리가 죽으면 다른 녀석도 따라 죽는 키싱구라미라는 상징기제는 이들을 구제하기엔 너무 연약하다.

더 큰 문제는 흥행이 면죄부이고 승자가 모든 걸 갖는 풍토에 있다. 영화와 영화를 만든 이와 관객 모두의 성장을 방해하는 이런 현상에 그래 나는 돌이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다.

김정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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