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나홀로 무역社' 열기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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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중소 전자업체 임원 출신인 유모 (58) 씨는 실직자에서 '1인 무역업체' 사장으로 변신했다. 무역업에 뛰어든지 처음으로 최근 7천만원어치의 화장품을 중국에 수출한 것.

유씨는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97년 말 회사를 그만두고 1년여의 암중모색 끝에 지난해 10월 화장품 30만원어치를 과일상자에 싸들고 인천발 중국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초행길이었지만 다롄 (大連).선양 (瀋陽) 을 사흘간 헤맨 끝에 10만원의 이익을 남겼고, 여기에 재미를 붙여 중국을 드나들다 고정 거래처까지 확보했다.

사업밑천은 휴대폰과 서울구로동 집 안방에 놓인 팩시밀리 한대가 전부. 경제위기 이후 '1인 가내 (家內) 무역업' 이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이들의 활동무대도 가까운 중국.일본은 물론 유럽 등으로 넓혀가는 추세다.

음식점 체인과 같은 IMF형 내수 업종의 창업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실직 가정과 미취업 대학졸업생은 물론, 신분이 불안한 직장인들까지 너도나도 해외 돈벌이에 가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 갑남을녀 (甲男乙女) 의 '1인 무역' =레미콘 회사에 10년 가까이 관리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Y과장 (38) 은 "밀려날 때에 대비, 미리 무역업에 발을 디뎠다" 고 말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중국 출장때 안면을 익힌 거래처와 인터넷을 통해 화장품 등의 수출상담을 하며 '미래사장' 의 꿈을 키운다.

유니텔.천리안 등 4개 PC통신에 개설된 '세계 보따리 무역정보' 서비스의 조회건수는 이달들어 하루 5백~6백건으로 지난 달보다 30% 가량 늘었다. 품목도 인삼 등 한국 토산품에서 고급의류까지 다양해지고 있다. 서울 남대문시장엔 보따리 물건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 1백여곳에 이른다.

한 여행업체 관계자는 "보따리 무역상이 2만~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고 말했다.

인천세관 관계자는 "인천항에서 중국으로 나가는 보따리 수출규모가 지난해 5억달러 정도니까 전체적으로 10억달러를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고 말했다.

◇ 개미군단 돕는 인터넷 = 인터넷 상거래의 발달은 무역업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크게 자극했다. 국내 최대 인터넷 무역정보망 (가입자 1만명, 하루 조회건수 5만건) 인 한국무역정보통신 (무역협회 자회사) 의 'EC코리아' 사이트엔 지난 석달간 1백91명이 사업자등록번호가 아닌 주민등록번호로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대부분 사무실도 없는 1인 무역업체라는 게 회사측 설명.

'개미군단' 의 출현에 힘입어 무역업체수도 크게 늘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말 무역업 신고업체수는 6만5천9백39개로 1월중 2천50개가 늘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1천1백39개) 은 물론 월평균 신고업체수 (1천5백개) 를 훨씬 웃도는 것이다.

◇ 환상은 금물 = 보따리 무역은 수백만원 정도의 밑천으로 사업자등록 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간편함 때문에 폭발적 관심을 끌고 있지만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중국 상인들은 가져온 물건을 며칠만에 몽땅 팔아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보따리상의 절박한 사정을 악용해 값을 턱없이 깎는다는 것. 구매 약속을 번복하는 일도 잦다.

보따리상 박모 (38) 씨는 "판매대금의 절반을 물건이 팔린 뒤 받기로 하고 중국에 여성의류.잡화류를 공급했으나 상대방이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2천만원을 손해봤다" 고 말했다.

이밖에 "인터넷을 통해 수출입 약속이 이뤄져도 물건 인도과정에서 상담이 깨지는 경우가 많다" 는 게 무역협회 관계자의 얘기다.

홍승일.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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