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전문가 ‘일본 8·30 총선’ 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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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외교와 한·일 관계에 관해


▶진창수=민주당은 미국과의 대등한 파트너십, 아시아 공동체 창설을 주장하고 있다. 당장 내년 1월 인도양에서 활동 중인 자위대 문제가 논란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는 민주당 정권이 현실적인 정책을 구사할 것으로 본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의 조부 이치로(一郞) 전 총리는 미국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소련과 협정을 맺었다. 균형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토야마 대표는 아시아공동체까지 주장하고 있는데, 이 공동체를 통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야마구치=미·일 동맹이 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미국이라는 수퍼파워를 상대로 새로운 자기 주장을 하기에는 아직 민주당에 아무런 준비가 없다. 이것이 민주당의 최대 약점이다. 하지만 아시아 외교 분야에서는 자민당보다 훨씬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역사인식·민족주의 면에서 민주당은 자민당에 비해 훨씬 상식적이다. 일부 우파가 있을 수도 있지만 민주당에는 조직적인 우익 세력이 없다. 무엇보다 (침략 역사를 반성한) 무라야마(村山) 담화를 계승하면서 상식에 입각해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동시에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진=한·일 관계는 좋아질 것이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보다 서로 역사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것, 문제가 일어났을 때 서로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문제에 대해 민주당 내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외국인 지방참정권 허용, 야스쿠니(靖國) 신사 대체시설 건설 등 한국이 원하는 구체적인 내용들은 모두 민주당 정책공약에서 빠졌다. (※그러나 하토야마 대표는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러한 정책들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현안은 내년 참의원 선거까지는 쟁점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시일이 거듭될수록 정권 지지율이 떨어질 수도 있다. 참의원 선거 이후에는 정작 지지율 때문에 이 문제를 제안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야마구치=선거 때는 민주당 내 보수파를 배려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민주당의 인권·역사에 관한 정책들은 조금 감췄다. 하토야마 대표도 인터뷰에서는 참정권, 추도시설 건립 등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 문제들은 모두 민주당 정권이 자발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이 지켜봐 줬으면 한다. 나를 비롯해 민주당 쪽에 가까운 학자들은 내년 한일합방(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화해와 협력의 메시지를 발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떻게든 그걸 하토야마 정권에서 실현하려고 노력 중이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부분이 공명당의 존재다. 이번 총선에서 패하면서 자민·공명 연합은 붕괴됐다. 공명당 내에는 정책적으로 너무 자민당에 접근했다는 반발이 있다. 이를 감안하면 민주당이 정책을 제안할 때 공명당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진=21세기 아시아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한·일 정치인의 교류를 늘리기 위한 채널을 마련해야 한다.

▶야마구치=우선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위한 구체적인 조직을 만들어 준비해야 한다. 한·일 양국 학자와 정치인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고 내년께 보고서도 하나쯤 나와야 한다. 아시아 공동체라는 장기적인 플랜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 자민당의 패인에 대해

▶야마구치=자민당 장기 집권에 대한 염증이다. 1980년대 이후 거품경제 붕괴와 저출산·글로벌화 등 구조적인 사회 변화가 일어났다. 자민당이 이런 변화에 맞춘 정책 전환을 게을리 한 탓이다. 93년 자민당이 잠시 정권을 놓은 것도 변화를 요구하는 여론 때문이었다.

▶진=직접적인 요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에게 있는 것 같다. 그의 개혁 정책, 신자유주의 정책은 자민당의 기반을 흔들었다. 소득격차와 도시·지방 간 격차가 심해졌고, 이런 불만이 폭발했다.

▶야마구치=보수왕국으로 불리던 동북지역 니가타(新潟)·나가노(長野)·규슈(九州) 등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다. 고이즈미 개혁의 일환인 민영화·재정삭감·지자체 합병 등이 자민당 패배를 가져왔다.

▶진=고이즈미가 자민당을 깨부쉈고,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가 민주당을 탄생시켰다는 말도 있는데, 자민당을 지지해온 일본 보수층이 달라진 것인가.

▶야마구치=결과론일지 모르지만 총리 2명이 잇따라 1년 만에 총리직을 내던진 것에 국민은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다. 민주주의란 결국 국민이 정권을 심판하는 것이다. 일본 국민은 처음으로 권력을 행사한 셈이다. 자민당은 선거 막바지에 네거티브 캠페인을 시작했다. 민주당과 노조와의 관계, 보수층을 겨냥한 애국심 캠페인 등이다. 그러나 이런 네거티브 선거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지방 농촌지역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유권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보수는 노조 비판이나 국가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게 아니다. 지역사회와 지역 내 단체·중소기업을 중시하고,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유지하자는 현실적인 보수층이다.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정책이 자민당엔 없었다. 반대로 민주당은 육아지원·고속도로 무상화 등 알기 쉬운 정책들을 제시했다.

정리=박소영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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