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194. 빅리거 추신수 참고 기다려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 추신수가 3일 LA 에인절스와의 홈경기에서 9회 대타로 출전, 타격하고 있다. 2루수 플라이로 아웃됐다.[시애틀 AP=연합]

추신수(시애틀 매리너스)는 4월 21일 메이저리그 승격을 통보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 정장 한 벌을 샀다. 2000달러(약 200만원)가 들었다. 회색 바지와 검은 색 재킷. 메이저리그의 점잖은 분위기를 고려해 튀지않는 색깔을 골랐다. 2000달러면 그에게 거금이다. 마이너리그에서 월급 2500달러(세금을 빼면 약 2000달러)를 받던 그다. 한 달치 월급을 모두 들일 만큼 기뻤다. 세련되고 폼 나는 빅리거들 틈에서 기죽기 싫었던 이유도 있었다. 캐주얼 웨어 차림으로 지내던 그는 새 정장이 아직 낯설다고 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빅리그에 입성했지만 야구일기장에는 오히려 쓸 말이 별로 없다. 마이너리그 때는 팀의 중심타자로 치고받고 활약이 많았지만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는 경기 내내 벤치만 지키고 있다. 낯선 분위기도 불편하고, 주눅 들고 기죽는 일 투성이다.

원정 경기를 위해 이동할 때면 베테랑들의 짐을 앞서 들어주기도 하고, 숙소에서 경기장으로 갈 때 스타급 선수 10여 명이 버스 한 대에 여유있게 앉아가는 데 반해 추신수 같은 신인선수들은 구단직원들과 함께 다른 버스에 타고 다닥다닥 붙어서 간다. 구단 전용 비행기에도 고참은 자리가 정해져 있는데 그는 탈 때마다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훈련 때 먼저 나서 볼을 줍는 것은 물론이다. 메이저리그에서 루키들의 허드렛일은 불문율이다. 보스턴 레드삭스에는 경기가 끝나면 신참들이 맥주를 챙기고, 고참들은 편히 앉아 후배들이 가져다준 맥주를 마시며 숙소로 돌아가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4월 마지막 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3연전 때 추신수를 만났다. "메이저리거가 된 뒤 달라진 게 뭐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받는 돈이 다르다(빅리그에 있는 동안 일당으로 따져 1000달러 정도 받는다고 했다)"고 했다. 마음 자세에 대해서는 "경기장도 크고, 관중도 많고, 모든 게 낯설다. 경기 분위기도 생소하다.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고 했다.

추신수의 '메이저리그 나들이(그는 곧 마이너리그로 돌아갔다 때가 되면 다시 올라올 거라고 했다)'는 이처럼 '경험 삼아'로서의 의미가 크다. 즉시 전력감이 아니라 신인으로서의 통과의례를 미리 경험시키기 위해 불러 올렸다고 보는 게 맞다. 그는 "게임에 뛰지 못해 답답하지만 감독의 배려를 이해한다. 나중에 다시 올라오면 지금 겪는 낯섦, 위축, 뭐 이런 건 없을 거 아닌가. 더그아웃에 앉아 게임을 보는 것만 해도 큰 공부다. 나중엔 보다 자연스럽게 메이저리그 분위기를 느낄 거고, 경기에 나가도 더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해선 알맞게 뜸을 들여야 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는 데도 일주일이 필요했다는 '기다림의 교훈'이 추신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 빅리그 경험은 허송세월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불편한 새 양복도 다시 올라올 그때는 편안하게 더 잘 어울릴 것이고.

<텍사스에서>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