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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日 시바 료타로상 받은 시오노 나나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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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로마인 이야기' 제7권 '악명높은 황제' 가 출간된 후 시오노 나나미는 일본의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郎) 상 제2회 수상작가로 선정됐다. 시바의 고향인 오사카 (大阪) 시가 마련한 문학상이다. 수상을 위해 그녀는 모처럼 로마에서 돌아와 오사카 리츠칼튼호텔에 묵고 있었다.

대담은 12일 낮12시 호텔 5층의 중국식당에서 진행됐다. 통역은 시오노의 에세이 '남자들에게' 를 번역한 데스카야마대 강사 이현진 (李賢進) 씨가 맡았다.

[만난 사람 = 권영빈 논설위원]

일본인 작가가 쓴 로마역사서가 어째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까지 지속적인 독자를 확보하면서 관심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가. 이런 의문을 품은 채 나는 그녀와의 대담 준비를 위한 '사무적인 독서' 를 하면서 결론을 이렇게 정리했다.

시오노의 작품엔 그녀 특유의 강한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그냥 로마역사가 아니라 시오노가 보는 역사다. 그렇다고 막가는 역사가 아니다. 철저한 고증과 현장 조사를 마친 바탕 위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냄새를 집어넣고 있다. 매력있는 남자란 자기 냄새를 피우는 사람이라는 시오노의 말처럼 그녀 작품 속에는 시오노 냄새가 강하게 배어있고 그 냄새를 맡기 위해 독자들은 다음 책을 기다리는 게 아닐까.

또 하나의 마력은 죽어있는 역사가 그녀 손길이 닿으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는데 있다. 역사책 갈피 속에 죽어있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21세기를 움직일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기 때문에 시오노의 역사 공예품을 감상하듯 '로마인 이야기' 에 빨려드는 게 아닐까.

- 시바 료타로상 수상을 축하한다. 시바의 '언덕 위의 구름' 과 시오노의 '로마인 이야기' 를 읽으면 어떤 상관성을 찾는다. 시바가 과거 일본 역사를 통해 패전 후 일본인의 긍지를 살렸다면 시오노는 로마를 통해 미래와 세계를 보는 눈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는가?

"시바 선생과 비견된다면 영광이다. 시바 선생의 공적은 역사와 과거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임을 가르친 데 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 작가다. 일본인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사만 썼다. 제국의 역사든, 개인의 역사든 건강할 때도 있고 병들었을 때도 있다. 그는 건강한 시기의 일본 역사만 썼다. 실패의 시기인 소화 (昭和) 시대의 역사를 그는 쓰지 않았다. 실패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위기관리능력이 없어진다. 나는 흥망성쇄의 통사 (通史) 를 쓰고 있다. 그 점이 나와는 다르다."

- 시오노의 역사는 정치의 역사다. 정치 지도자들의 역사고 권모술수의 미로를 풀어가는 듯한 추리소설적 경향이 있다.

"시바 선생은 정치를 다루지 않았다. 나와 다른 두번째 차이다. 보통 정치란 권력자 한 사람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얼마 전 로마에서 한 전시회가 열렸다. 로마제국 멸망시 외족이 쳐들어왔을 때 로마 서민들이 무엇을 숨겼는가를 보여주는 특이한 전시회였다. 전시품은 보잘 것 없는 가재도구였다. 밥 짓는 냄비와 그릇 등이 고작이었다.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손해보는 것은 서민이다. 죽는 것은 서민인데 서민들은 정치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정치를 잘못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주자는 게 내가 역사서를 쓰는 중요 요인이다. 흔히 인텔리들은 정치를 비하하거나 경시한다. 그래선 안된다. 지식인들은 많은 사람들 편에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로마가 망할 때도 지식인들과 유력자들은 모두 금은보화를 싸들고 동로마로 도망을 갔지 않은가."

시오노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과감하고 단호하게 자신의 주장을 편다. 시바가 '일본인 작가' 라면 자신은 '세계인적 작가' 라는 긍지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정치관이 우리 역사에도 부합한다는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6.25가 터졌을 때 보통사람들의 피난 보따리가 어떠했던가. 이불과 냄비꾸러미를 주렁주렁 달고 피난길에 올랐을 때 정치가와 유력자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가. 지도자들의 무지와 방만이 경제파탄을 몰고 왔고 1백80만 보통사람들의 일자리와 쉴 곳을 빼앗아갔지만 지금 그들은 무얼 하고 있는가.

- 정치가 삶의 현실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정치적 관심은 매우 높다.

"정치적 관심이 높다고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스와 로마를 비교해 보자. 두쪽 모두 정치적 관심은 높았다. 그리스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제였다. 로마는 원로원과 호민관을 통한 간접적 대의정치였다.

그러나 그리스는 민주파와 공화파가 갈려 망할 때까지 당쟁을 일삼았다. 문제는 정치관.문제해결방식에 있다. 로마는 자신들간의 대결을 하지 않았다. 테제 (正) 와 안티테제 (反) 속에서 진테제 (合) 를 만드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아테네는 적을 용서하지 않는 원리주의자였지만 로마는 모두를 합치는 '관대함' (클레멘티아) 을 중시했다. 클레멘티아는 영어의 관용 (tolerance) 과는 다르다. 용서만 하는게 아니라 적을 내편으로 동화시켜버리는 것이다."

시오노가 로마사를 통해 발신하는 가장 강한 메시지가 바로 이 관용의 미덕이다. 요즘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화합의 능력이다. 시오노는 로마제국의 '관용의 출구' 를 로마시민권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로마시민권을 얻을 수 있게끔 법은 열려있었다.어제의 아프리카 속주의 노예가 내일이면 로마시민이라고 떠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었다.

속주 출신의 군인이 황제까지 올라가고 로마를 숱하게 괴롭혔던 갈리아인이 원로원에 들어간다. 적과 동지가 따로 없고 로마를 배반하지 않는 한 모두가 로마인이 될 수 있는게 로마의 개방성과 관용성이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을 때 그의 핵심 부장이 정적 폼페이우스 편으로 붙는다.

카이사르는 한번도 이를 원망하지 않는다. 당대의 명 변호사였고 원로원을 장악했던 철학자 키케로가 폼페이우스 편으로 달려가지만 끝내 그는 카이사르에게 동화된다.

글로벌시대에 시오노 나나미가 뜨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동과 서가 갈리고 보수와 혁신이 나눠지며 체제와 반체제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는 우리 사회, 우리 정치가 로마에서 무얼 배워야 할까.

- 카이사르의 말대로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한다. IMF체제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 독자들은 위기시대를 극복할 지도자의 조건을 로마사를 통해 배우고 싶어할 것이다. 리더의 조건 하나만을 꼽는다면….

" '이 일만 끝내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결단의 지도자' 가 필요하다. 예를 들자. 4년전 고베시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당시 무라야마 총리가 만약 '이것으로 끝낸다' 는 각오만 했다면 희생자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자위대를 구호사업에 투입해야 된다 안된다로 논의만 했지 끝내 투입하지 않았다. 법에 얽매이고 체면 때문에 할 일을 하지 못했다. 총리가 각오만 했다면 자위대도 움직였고 희생자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

시오노는 정치가의 자질 첫번째를 위기관리 능력에 두고 있다. 고베 지진에서 보인 일본 지도자들의 무능력을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시오노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로마가 천년제국으로 장수하는 데는 인치 (人治) 보다는 법치 (法治) 가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 관점이다. 로마법과 원로원이 있어 황제의 권한과 통치에 대한 견제와 비판이 가능했기 때문에 권력의 남용과 부패를 막을 수 있었다고 본다. 특히 인치 정치에 시달려온 우리로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 인치와 법치는 공존하기 어렵지 않은가. 인치의 남용이 가져오는 폐단을 무시하는가.

"법이란 평화로운 시기를 위한 장치다. 완전하지도 않다. 이를 보충하는 것이 지도자의 자질이다. 또 천재지변 같은 불가측 사태에선 법이 저절로 작동되지 않는다. 법률이 재해를 막을 수 있나. 예측불허의 위기상황에서 대담한 결정을 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능력이 리더의 첫번째 조건이다.

책임지고 물러날 줄 아는 신념있는 지도자가 진정한 리더다. 일본정치가들은 군대를 만지면 큰 일 난다고 터부시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집단이든 격리하면 응집력이 생기고 섞이지 못하면 고착화가 된다. 엘리트 집단도 마찬가지다.

왜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넜는가. 원로원이 경직돼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새 피를 넣는 수혈 (輸血) 작업이 필요했다고 보았다."

원래 대담시간은 2시간 잡혀있었다. 오후 2시부터 독자 사인회가 있어 더 이상 잡고 늘어질 수 없는 시간이 됐다.

- 대담을 시바 료타로에서 시작했다. 일본이나 한국이 부의 규모는 다르지만 상당히 높은 언덕에 올랐다. 한국은 지금 IMF라는 구름에 가려있고 일본은 버블경제 이후 장기간 구름에 갇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언덕 위의 구름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로마에서 찾는다면….

"일본의 가장 큰 결점은 무엇이든 혼자서 처리할 수 있다는 오만이다. 로마를 봐라. 그리스인보다 못한 지력 (智力), 켈트인보다 못한 체력, 카르타고보다 못한 경제력,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한 기술력으로 천년제국을 이룩하지 않았는가. 무엇이든 다 잘 할 수는 없다. 역할 분담을 통해 서로를 조화롭게 통합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장사는 장사꾼에게, 국방은 군인에게 맡겨야 한다. 일본인이 잘 하는 것, 한국인이 잘 하는 것, 서로의 장점을 살려가면서 아시아적 유대를 생각해야 한다."

아침, 숙소였던 나라 (奈良) 시의 호텔을 나설 때는 비가 제법 세차게 내렸지만 대담을 끝내고 돌아가는 전철밖 창가엔 파란 하늘에 뭉개구름이 피고 있었다.

오늘의 화두가 무엇이었던가. 화합과 상생 (相生) 의 지혜인가. <오사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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