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 평화회담 길은 아직도 멀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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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코소보 평화회담이 신유고연방과 코소보 알바니아계 주민, 6개 중재국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파리 교외 랑부예에서 6일 개막돼 2주에 걸친 협상에 들어갔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개막연설에서 "유럽에서 더 이상 학살과 인권유린이 발생해서는 안된다" 며 "평화정착을 위해 코소보에 강대국 군대가 주둔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회담 1차 시한은 12일이며 이때까지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20일까지 연장된다.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는 최종시한까지 결론이 나지 않으면 신유고를 공습하겠다고 위협하며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중이다.

신유고연방과 연방내 세르비아공화국 협상대표단은 NATO공습을 우려한 의회의 종용에 따라 회담에는 참석했으나 요지부동으로 '코소보 자치불가' 입장을 고수중이다.

조상들이 피로써 지켜온 세르비아인의 땅이라는 것. 5일 독일을 방문한 밀네니치 신유고연방 공보장관이 "자치허용 가능" 이라고 말해 잠시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직후 신유고 대통령궁은 알바니아계 협상단에 포함된 코소보해방군 (KLA) 이 '테러집단' 이라며 대화불가 방침을 발표하는 등 혼선을 보였다.

신유고내에 강온 양파가 대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대표단은 2백만 인구중 알바니아계가 90%이고 45년 티토의 옛유고연방 창설 이후 89년까지 누리던 자치권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다만 독립에는 서방도 반대하고 있어 이번 회담에선 거론하지 않을 방침이다.

독립주장으로 27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바람에 '코소보의 만델라' 라는 별명을 지닌 알바니아계 정치가 아뎀 데마치는 회담에 초청되지 않았다.

미국.영국.프랑스를 비롯한 6개국 중재단은 현재 2만여명에 이르는 코소보내 신유고군을 4천명으로 줄이고 코소보에 파견중인 1천여명의 비무장 평화감시단을 3만명 정도의 합동 평화유지군으로 교체해 힘으로 평화를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3년간 국제사회 보호아래 자치를 실시하고 선거를 통해 다수인 알바니아계가 주축이 되는 자치정부를 구성한 후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것이다.

◇ 협상단 성향

신유고연방측과 코소보 알바니아계 협상대표단의 면면을 살펴보면 회담이 난항을 겪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우선 신유고연방 협상단은 강경파로 짜여있다.

대표인 세르비아공화국 부총리인 라트코 마르코비치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신유고연방 대통령의 절친한 고향 친구이자 대리인이고, 부대표인 니콜라 사이노비치 (신유고연방 부총리) 도 강경파. 이들은 코소보 자치를 반대하면서 대신 포로교환과 휴전협정 정도로 회담을 끝내자고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신유고연방 협상단의 '비밀병기' 는 레피크 세나도비치 이슬람교도 대표, 제이넬라비딘 쿠레이스 터키계 주민대표 등 소수 종족.종교 대표자들. 불과 수만명에 불과한 인구를 대표하지만 신유고연방이 다양한 종족.종교에 포용책을 펴고 있다는 선전에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코소보 알바니아계 협상대표단은 이브라힘 루고바의 온건 코소보민주연맹 (DLK) 측과 강경 코소보해방군 (KLA) 측으로 양분돼 있다.

전자 (前者) 는 비폭력 투쟁으로, 후자 (後者) 는 무장투쟁으로 각각 자치를 얻어내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점 역시 협상의 장애물로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회담이 시작되자 알바니아계 대표단의 분위기는 평화를 주장해온 루고바에 의해 주도되는 형국이다.

루고바는 회담 직전에 코소보 내 영향력 있는 언론인 베톤 수로이의 지지를 얻어내는 동시에 유화정책을 반대해온 연합민주운동 대표 렉스헤프 코사와 극적으로 화해하기도 했다.

◇ 코소보 '피의 역사'는

코소보는 중세부터 20세기까지 세르비아가 피로써 지켜온 땅이다.

1398년 세르비아는 코소보에서 벌어진 오스만터키 군대와의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속국으로 전락했다.

터키는 국경안전을 위해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을 전원 추방, 무주공산으로 비워뒀다가 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알바니아인들을 불러 정착시켰다.

현재 코소보 알바니아계는 이들의 후손. 1878년 독립한 세르비아는 1912년, 1913년 두차례 전쟁을 거쳐 코소보를 되찾았다.

1941년 세르비아를 점령한 나치독일이 코소보를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알바니아에 떼줬으나 전쟁 중 티토 (전 유고대통령)가 이를 탈환했다.

2차세계대전 후 집권, 민족화합책을 쓴 티토는 유고슬라비아를 5개 공화국과 2개 자치주로 재편하면서 코소보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89년 연방붕괴 후 세르비아공화국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그후 97년 몬테네그로와 합쳐 신유고연방을 창설하면서 세르비아공화국의 일개 주로 격하했다.

이 과정에서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의 싸움이 벌어져 양측에서 수천명이 사망했다.

채인택.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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