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일 정권교체, 한·일 ‘보편적 관계’ 출발점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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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일본 국민은 변화를 선택했다. 어제 실시된 총선에서 제1야당인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비록 1993년에 잠깐 정권을 놓은 적은 있지만, 자민당이 제1당 지위와 정권을 한꺼번에 빼앗긴 것은 1955년 창당 이래 처음이다. 민주당과 차기 총리 취임이 확실시되는 하토야마 유키오 당 대표에게 주변국들이 지대한 관심을 쏟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내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주당이 집권하더라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의외로 절반이 넘는다. 54년에 걸친 사실상의 1당 지배체제를 종식시키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새 정권에 전폭적인 기대도 걸지 않는다는 민심이다. 그래서 유권자들이 ‘불신’보다는 차라리 ‘불안’을 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믿을 수 없는 자민당을 버리고, 집권 경험이 없어 불안하지만 변화를 외치는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는 말이다. 사실 중학생까지 전원을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 수당, 공립고교 수업료 공짜, 고속도로 무료화 등 민주당의 간판 공약에 대한 호감도는 그리 높지 않다. 그럼에도 일본 유권자들은 정권교체를 단행했고, 민주당과 하토야마 대표의 어깨에는 이제 무거운 짐이 실렸다.

일본의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우선 내치(內治)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길 기원한다. 동시에 외교 면에서도 국력에 걸맞은 책임감과 지도력을 발휘해 주길 간곡히 당부한다. 특히 한·일 관계 측면에서는 양국 관계의 ‘보편화(化)’ ‘일반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양국 관계가 과거사·영토 문제만 불거지면 냉각상태에 빠져버리는 ‘특수 관계’ 속에서 언제까지 헤매야 하는가. 해방 후 64년이 지났고 내년이면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이다.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양국 관계가 엄청나게 깊어지고 넓어졌지만, 과거사라는 특수성에 맞닥뜨리면 모든 것이 함께 휘둘리곤 했다.

물론 양국 간에는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특별 담화, 98년 김대중 대통령·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등 의미있는 외교적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파동이나 일본 측의 ‘망언’ 한마디에 다시 원점으로 후퇴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교과서 파동을 맞아 당시 주일대사를 사실상 소환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우리 국민에게 상처 주는 발언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래서야 악순환이 되풀이될 뿐이다. 이제 독일·프랑스처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양국 관계 구축이 절실하다. 민주당 정권은 한·일 관계가 왜 보편적인 외교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는지 냉정히 천착해 필요한 조치들을 밟아 나가기 바란다. 한국 지도자들도 과거사 문제를 정권 차원에서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다행히 하토야마 대표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총리가 되더라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민주당 내에는 재일동포 지방참정권 허용이나 종군위안부에 대한 사죄·보상 등에 긍정적인 목소리가 많다. 한·일 양국은 북한핵·자유무역협정(FTA) 등 수많은 현안을 공유하고 있다. “과거를 직시할 용기가 있다”고 자임한 하토야마 대표의 말대로 새 정권이 과거사를 넘어 새로운 한·일 관계를 여는 데 앞장서 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