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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안양철교밑서 밤새 기적소리 녹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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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한국 영화의 역사를 배우고 미래를 전망하는 배움터가 되었으면 합니다."

50여년간 한국 영화 녹음기술 분야를 개척하고 발전시켜온 이경순(83.한양스튜디오 대표)씨. 그의 이름을 딴 '소리의 창조-이경순 영화기념관'이 12일 개관했다. 평생 고락을 함께해 손때가 짙게 묻은 녹음 기기와 한국 최초의 조명기 등 각종 영화 관련 자료를 모아 놓았다.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마둔리에 자리잡은 기념관(대지 800평, 건평 60평) 주위엔 벼 이삭들이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받은 그의 얼굴엔 평소보다 더 짙은 붉은 색이 감도는 듯했다. 한국 영화계의 산 역사인 그이지만 오늘만큼은 흥분을 감출 수 없던 것일까.

"1947년 영화 '갈매기'(이규환 감독)부터 시작해 90년대 중반까지 만들어진 2000편이 넘는 작품들이 저의 작업실을 거쳐갔어요. 50, 60년대까지는 전파상에서 중고 기자재를 사다가 직접 조립한 기계로 녹음을 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고물'들이지만 이것이 한국 영화의 역사라는 생각에 한곳에 모아 두었습니다."

2000편 이상이라면 한국 영화의 70%가 넘는 분량이다.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인 '악야'(52년),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과 이만희 감독의 '구원애정'(55년), 한영모 감독의 '자유부인'과 유현목 감독의 데뷔작 '교차로'(56년), 김기덕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62년), 임권택 감독의 '평양감사'(64년) 등 한국 영화사의 맥을 짚을 수 있는 작품들을 그가 녹음했다. '빨간 마후라''잉여인간''만추''안개''바보들의 행진'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제가 젊었을 땐 '후시녹음' 시절이었어요. 요즘은 조그만 기계를 들고 다니지만 그때는 커다란 쇳덩이였기에 따로 작업실이 있어야 했습니다. 62년에 사재를 모두 털어 수입한 독일제 시맨스 녹음기와 마이크에는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마이크 앞에 못서면 '절름발이 배우'로 통했지요. 요즘의 동시녹음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절입니다."

김승호.최무룡.허장강.김진규.신영균 등 당대 스타들의 입이 스쳐간 그 마이크도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이씨가 해방 직후 월남할 때 유일하게 들고 왔던 '테스타'(음향기기 진단 기계)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41년 경성전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의 빅타축음기주식회사 경성영업부 라디오부에 근무할 때부터 사용하던 기기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로 이씨는 '피아골'과 '오발탄'(61년, 유현목 감독)을 꼽았다. 이날 개관식에 참석한 유현목 감독은 "'오발탄'의 사운드에 대한 독립 논문이 있을 정도"라면서 영화 녹음에 대한 이씨의 열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주인공 남녀가 만나는 배경에 기적소리가 나오는데 처음엔 당시 흔히 쓰던 미국의 레코드 효과음을 사용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경순 선생이 '리얼리티가 없어 안 된다'며 직접 녹음기를 들고 안양 철교 밑에서 밤을 새워 새벽까지 녹음을 해 가지고 왔어요. 제작비 때문에 사흘을 배정했던 녹음이 결국 보름이나 걸리고 말았지만 그만큼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씨는 당초 어머니의 묘를 이장할 장소로 안성의 땅을 선택했다. 집 한채도 지어 1년 전부터 영화 기기를 하나 둘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안성문화원의 김태원 원장이 "이왕이면 이것들을 모아 안성의 명소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해 기념관으로 결실을 보게 됐다.

자료발굴과 정리를 도운 한국영화인협회 신우철 이사장과 한국영화인복지재단 전진우 이사장은 이날 개관식에서 "많은 영화인이 기념관 장소로 서울을 제안했지만 이경순 선생이 '지방 문화를 육성하는 데 기여하겠다'며 안성을 고집했다"고 소개했다.

이씨의 아들 이영길(63)씨도 대를 이은 영화 녹음기사다. 64년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1회로 졸업한 이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그는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너무 박봉이다 보니 요즘 후배들은 시작했다가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며 아쉬워 했다.

안성=배영대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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