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도 꼭 허락받아야 하는 그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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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 진출이 이슈가 될까?’ 대답은 'NO'다. 더 이상 사회에 ‘금녀’의 구역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조계, 외교관, 군인, 엔지니어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제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 분야의 진출이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장기간 살아남는 것이다. 엔지니어 분야의 경우 가장 대접이 좋다는 미국조차도 여성 엔지니어의 비율은 5.7%에 그친다. 연구·개발직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엔지니어 환경에서 결혼, 출산, 육아 등의 문제는 여성에게 큰 책임으로 남는다. 실제 한국여성공학기술인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산업체에 근무하는 여성 엔지니어의 15.7%가 자녀를 가질 계획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기 대학생들~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에요.’

UL코리아의 박슬기 대리는 5년차 여성 엔지니어다. 그녀의 업무는 수출을 앞둔 전자제품의 안전인증을 검사하는 것으로 최근에는 한국 전자제품의 주력 상품인 LED 관련 제품을 담당하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삼성, LG도 그녀의 주된 고객이다. 이 대기업들이 발표하는 신제품을 수출 전 자신의 손으로 안전검사를 실시한다. 그녀의 안전인증을 받아야 미국시장에 수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 대리는 정확한 주 5일 근무와 자유로운 휴가 사용으로 자기 계발 및 여가 선용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퇴근 후 운동부터 시작해 제과제빵을 배우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종종 여행을 떠난다. 업무강도가 살인적이라는 엔지니어 분야에서 이런 여가 생활이 어떻게 가능할까? “대학 때부터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공학 분야의 공부는 재미있었지만 취업한 선배들을 보면 신기술 개발로 늘 야근을 달고 있더라고요. 말 그대로 공돌이, 공순이가 된 거죠. 저는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 두려웠어요.”

공대를 졸업한 후 대기업 개발팀에 입사하는 것, 이것은 어쩌면 한국 공대생들에게 최고의 진로이자 이미 결정된 운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정해진 진로를 과감히 부정하고 다른 길을 모색했다. “대학 때는 주변을 보는 시선이 좁잖아요. 특히 사회에 대한 정보는 선배들을 통해 듣게 되죠. ‘정말 엔지니어는 개발직밖에 없을까?’ 정답은 ‘아니다’예요.” 자신이 알지 못한 엔지니어의 새로운 분야를 찾기 위해 박슬기 대리는 제일 먼저 대기업을 포기했다. 한국의 대기업을 포기하니 외국계 기업의 채용 공고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엔지니어의 대다수가 개발직이긴해요. 취업정보를 샅샅이 뒤지다보니 ‘UL코리아’라는 기업이 있더라고요. 이 기업의 정보를 수집했죠.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선배들에게 조언을 얻고 취업설명회도 찾아갔어요. 그때 안전인증이라는 색다른 엔지니어 분야를 찾았죠.”

“엔지니어도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뿐, 어렵게 UL코리아에 입사를 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박 대리를 괴롭혔다. “안전인증 업무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져야 하더라고요. 다른 회사의 개발품을 검사하는 것이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죠.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공순이가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지려니 그게 쉽나요.”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때 남성들의 영역이라 불리던 기술 분야에서 남녀차별 역시 쉽지 않은 문제였다. “제가 담당했던 한 제품에 문제가 있어 안전인증 검사에서 불합격을 통보했어요. 나이 지긋한 개발자분이 전화를 하셨어요. 네가 뭔데 내가 개발한 제품을 평가하냐고 하더라고요. 담당자를 연결해 달라고 해서 제가 담당자라고 하니 남자를 바꿔달라고도 하시고요.” 사람을 대하는 것이 개발보다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연구실은 상처를 주진 않았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거잖아요. 오늘의 이슈도 외우고 스포츠 뉴스도 챙겨봤어요. 남자 분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했거든요. 그렇게 가벼운 대화부터 시작해 업무까지 이어지는 거죠. 덕분에 말솜씨도 많이 늘고 이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즐거워요.”

뉴스방송팀 강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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