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즘은 끔찍한 유산'-獨 헤어초크 대통령 의회연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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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과거 역사에서 잊고 싶은 부분이 있다고 그 장 (章) 을 지워버린다면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 "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이 수치스런 과거를 덮어두려는 움직임에 준열한 일침을 가했다.

헤어초크 대통령은 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54주년 기념 의회 연설에서 "나치즘은 우리 모두의 끔찍한 유산이며 이를 역사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시도는 비겁한 태도" 라고 강조했다.

그가 독일의 각성을 촉구한 것은 히틀러의 제3제국 시절 경험이 없는 신세대들 사이에 "나치즘은 나와 관계없고 더 이상 전범의 멍에를 지기 싫다" 는 경향이 커지고 있기 때문. 독일은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왜곡과 변명을 일삼는 일본과 달리 나치범죄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지속해왔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치 역사를 기록, 히틀러가 저지른 흉악한 범죄를 가르치고 나치즘에 대한 언론과 사회단체의 문제제기도 끊이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나치 희생자들에게 지급한 보상금 규모는 2천억마르크 (약 1백45조원)에 이른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아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혼령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회 일각에서 나치의 반유대주의 복고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있는 게 사실이다.

독일의 저명작가 마르틴 발저는 지난해 말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 최고상 수상 연설에서 "일상의 일과처럼 아우슈비츠에 대해 듣는 것이 지겹다" 고 발언, 파문을 일으켰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도 "더 이상 범죄자 독일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독일이 되겠다" 고 선언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초청한 1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 기념식에도 불참했다.

총선 전 그가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을 건립하는 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음에도 정작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최근 독일 국민의 의식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독일 의회와 정부.시민단체들은 수년째 홀로코스트기념관 건립 문제로 논란을 벌이고 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독일 최대은행 도이체방크가 수백만달러 규모의 홀로코스트 배상기금 설립을 모색중이지만 이는 미국 뱅커스트러스트와의 합병에 대한 유대인단체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헤어초크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서 "현재의 독일인 대부분이 홀로코스트에 직접 책임이 없지만 홀로코스트의 재발을 막아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고 역설했다.

이훈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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