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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기춘, 베이징서 흘린 눈물 네덜란드서 닦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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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왕기춘(21·용인대·사진)이 27일(한국시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벌어진 2009 세계유도선수권 73㎏급에서 우승했다.

결승에서 왕기춘은 안정된 수비와 강력한 힘으로 북한의 김철수(27)를 밀어붙여 절반과 유효를 따내면서 완승했다. 왕기춘은 64강전부터 8강전까지 4경기 연속 한판승을 거뒀고, 준결승에선 만수르 이사예프(러시아)를 절반으로 눌렀다. 그는 우승이 확정된 후 두 손가락을 펴 보였다. 세계선수권 2연패를 했다는 의미다. 한국 유도에서 세계선수권을 연속 제패한 선수는 전기영(3연패)과 왕기춘뿐이다. 왕기춘은 정훈 감독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울지 마라. 눈물 나면 참아라. 입술을 깨물어 피가 나더라도 참아라. 그리고 당당히 일어서라’.

왕기춘이 이번 대회를 앞두고 자신의 미니 홈피 ‘마음’난에 올린 글 중 일부다. 짧은 글이지만 비장한 메시지를 담았다. 아직 스물한 살인 왕기춘은 이런 각오로 대회에 나왔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금메달을 따면 인기 그룹 원더걸스의 유빈과 만나게 해 달라”고 조르던 평범한 스무 살 청년의 마음이 1년 만에 독하게 바뀌었다.

그의 마음속엔 한이 있었다.

왕기춘(左)이 8강전에서 세제르 무이수르(터키)에게 한판승을 거두고 있다. 왕기춘은 64강전부터 8강전까지 4경기 연속 한판승을 거뒀 다. [로테르담 로이터=연합뉴스]


그는 지난해 국내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판정 덕에 ‘한판승의 사나이’ 이원희(28)를 제치고 베이징 올림픽에 나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왕기춘 자신도 “판정 덕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원희가 누구인가. 올림픽·세계선수권 등 굵직한 국제대회를 모조리 석권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이다. 왕기춘이 은메달에 머무르자 ‘선배 이원희가 나갔다면 금메달을 땄을 텐데’라는 시선이 그의 얼굴에 박혔다. 결과적으로 그는 한국의 금메달 하나를 앗아 간 부정선수가 돼 버렸다. 왕기춘은 경기 후 “원희형에게 미안하다”며 울었다.

이후 그는 독을 품었다. 정훈 대표팀 감독은 “어린 선수답지 않게 혹독한 훈련도 끝까지 따라왔다”며 “기춘이는 지난해와는 정신자세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왕기춘이 홈피에 올린 글 중엔 이런 말도 나온다.

‘그리고 나를 무시하고 깔보던 사람들 앞에 당당히 맞서라. 뒷걸음질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 그리고 이겨라. 그러기 위해선 울 시간도 없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왕기춘은 더 강해졌다. 베이징 올림픽 결승에서 패배한 후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이번 대회까지 44연승을 기록하고 있다. 이원희가 2003년 기록한 48연승이 가시권이다.

성호준<기자kar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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