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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어메니티 서천’과 ‘위대한 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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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그러고 보니 나도 휴가나 출장 등으로 대한민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목격한 슬로건들이 많다. 강원도 강릉시의 ‘솔향 강릉’, 경기도 안성시의 ‘안성맞춤’, 전남 구례군의 ‘자연으로 가는 길’, 고흥군의 ‘지붕 없는 미술관’, 경남 하동군의 ‘역시! 하동’ 같은 슬로건은 귀에 쏙 들어오면서도 그 지역의 풍광과 특징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언젠가 가서 살고 싶은 지자체, 생산품을 사주고 싶은 지자체라고 은근히 꼬드기는 슬로건들도 있다. 경북 영양군의 ‘핫(Hot) 영양’을 보면 특산품인 고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녹차 수도 보성’도 마찬가지다. 전국의 군 단위 지자체는 대부분 인구 부족과 노령화를 걱정하고 있다. 경북 군위군의 ‘전원주택의 최적지, 삼국유사의 고향’이라는 슬로건은 은퇴 후 시골에서 노후생활을 보내려고 계획 중인 도시인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많은 지자체 슬로건들은 아직도 요령부득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품평을 해보고 싶어졌다. 어디까지나 슬로건에 대한 평가이지 지역 주민에 대한 평가는 아니니 혹시라도 오해하지 마시길.

우선 ‘의욕 과잉형(型)’ 슬로건이 눈에 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세계 최고 선진 용인’이라는 대형 입간판을 만난다. 세계 최고? 내 기억으로는 대규모 시청 건물 정도가 세계 최고에 근접했지 싶다. 경기도 구리시가 ‘고구려의 기상, 대한민국 구리시’라고 주장하는 것도 내 눈에는 의욕 과잉이다. 아차산에 고구려 유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 지역은 백제·고구려·신라가 뺏고 빼앗기던 지역이었는데 굳이 고구려만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 강한 어감을 선호하는 경향은 부산시 사상구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사상’이다. 외지인들이 사상구를 위대한 철학자들의 집단 출생지로 오해할까 봐 겁난다.

‘억지 춘향형’도 있다. 대전광역시의 슬로건은 ‘It’s Daejeon’이다. 대전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뜻이란다. 대전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영어 It’s는 Interesting(재미), Tradition&Culture(전통과 문화), Science&Technology(과학과 기술)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무리 아닐까. 브라질이 자국의 IT(정보기술) 산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유명한 브랜드 슬로건 ‘Brazil it!’이 연상되지만, 내용은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다. 경북 청도군의 슬로건 ‘Sing green’도 9개의 영어 단어에서 이니셜을 따왔지만 누가 그걸 다 기억할지 궁금하기만 하다.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살까 봐 걱정되는 슬로건도 있다. 충북 영동군은 ‘레인보우(무지개) 영동’을 내걸고 있다. 영동의 깨끗한 이미지와 대표적인 특산품을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무지개 깃발은 동성애자들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나는 영동군청에 무지개 깃발이 걸려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지자체장들은 저마다 잘 해보려고 애쓴다. 브랜드 슬로건이나 심벌 마크도 잘 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이왕 만들려면 세련되게 만들라.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좌우하는 법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