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유산답사기]23.조선화의 제한된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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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한이 현대미술에서 당당히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장르는 조선화 (朝鮮畵) 다.

지금 남한에서 동양화 (東洋畵) 혹은 한국화 (韓國畵) 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동양화와 한국화는 그 언어의 형성과정과 쓰이고 있는 상태가 확실한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화기 때 서양의 유화가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수묵화와 채색화를 지칭하는 말로 동양화라는 명칭이 사용돼 오다가 70년대에 들어와 일본은 일본화, 중국은 국화 (國畵) 라고 부르는 관행에 맞춰 우리도 한국화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개념이 확고한 것도, 대중적 동의를 얻어낸 것도 아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의식적으로 조선화 장르를 개발해 왔다.

그 첫 단초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김일성 교시에서 시작됐다.

1954년 김일성은 '조선화를 발전시키는 데 대한 강령적 교시' 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우리는 조선화의 선명하고 간결한 전통적 화법을 연구해 그것을 우리 시대의 요구에 맞게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

이러한 조형적 과제에 대한 탐구는 근원 (近園) 김용준 (金瑢俊.1904~1967)에 의해 주도됐다.

도쿄 (東京) 미술학교 출신의 서양화가이자 마지막 문인화풍의 동양화가이며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아우른 미술평론가이고, '조선미술대요' (1947) 와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1958) 의 저자인 미술사가였으며, 매화꽃보다 더 품위있는 문체로 '근원수필' (1948) 을 펴낸 당대의 문사였던 김용준.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를 지내다 국대안 (國大案) 반대운동으로 교수직을 버리고 6.25중 월북한 김용준은 훗날 숙청당했다는 설이 나돌 정도로 그의 주장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1950년대 조선화의 새로운 가능성 모색은 그에 의해 이끌어졌다.

김용준은 1955년 '조선화 표현형식과 내용에 대하여' ( '력사과학' 1955년 2월) 를 발표하면서, 기계론적으로 본다면 봉건시대의 문인화는 관념적인 화풍으로 배격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그렇게 단선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전통이 없는 민족은 새로운 문화창달도 없는 바… 문인화는 비록 현실묘사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기법은 사실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긍정적 일면이 없지 않은 것이다. " 이런 입장에서 김용준은 아마도 그의 최고 명작이라고 할 '승무' (1957) 를 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역시 월북화가인 정종여 (鄭鍾汝)가 그린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1958) 는 획기적인 업적으로 이후 조선화는 수묵화에 뿌리를 두면서 기법과 내용을 사실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에서 추구됐다.

실제로 이 두 작품은 지금 조선미술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조선전사' '조선미술사' 에 당당히 올라 있는 1950년대 북한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조선화의 방향을 수묵화가 아닌 채색화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이여성 (李如星) 이 '조선미술사개요' (1955.평양 국립출판사)에서 수묵화의 사의성 (寫意性) 을 철저히 봉건잔재로 비판하면서 일어났다.

이에 대해 김용준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사실주의 전통의 비속화를 반대하여' ( '문화유산' 1960년 2호) , '회화사 부분에서의 방법론상 오류와 사실주의 전통에 대한 왜곡' ( '문화유산' 1960년 3호) 을 계속 발표하면서 그런 식으로 조선화를 몰고 가는 것은 전통회화의 독특한 미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용준 편도 적지 않았다.

리진남의 '양어장' (1961) 같은 작품은 김용준을 지지하는 화가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김용준의 편이 아니었다.

1963년 조선화분과 토론회는 급기야 수묵화가 배격돼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문인화가들의 주관주의적 취미에서 형성된 수묵화적 영향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천리마의 약동하는 시대를 반영할 수 없으며 조선 바탕도 실현되지 않는다. … 채색화가 강조되는 것은 묘사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진실하고 건전한 사실적 묘사에 안받침되지 않고서는 새시대의 내용도 박력있게 반영할 수 없다. "

김용준이 수묵화에서 사의 (寫意) 란 관념이 아니라 내면적 리얼리티의 동양적 표현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 깊은 뜻이 이해되기는 커녕 봉건적 발상으로 몰리고 만 것이다.

이런 기류에서 신세대들의 김용준에 대한 공격이 크게 일어났다.

한상진의 '민족고전 평가에 나타난 편향' , 조준오의 '예술평론에서 복고주의를 반대하며' 라는 글은 결국 김용준 노선의 비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채색화 부문에서 종래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화풍이 일어났다.

리창의 '낙동강의 할아버지' (1966) , 김의관의 '남강마을의 녀성들' (1966) 은 6.25때의 소재를 다루면서 채색화의 박진감과 수묵화의 붓맛을 절묘하게 살려냈다.

이런 그림에 비할 때 김용준이 주장하는 수묵화는 진부하고 힘이 없어 보이며 최소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 않아 보였다.

그런 상태에서 김일성 주석은 1966년 10월 '우리 미술을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미술로 발전시키자' 는 담화를 발표하며 채색화에 손을 들어준다.

이후 북한의 조선화는 현대채색화로서 나아가게 된다.

최계근의 '용해공' (1968) , 정영만의 '강선의 저녁노을' (1973) 같은 명화도 낳게 됐다.

그러나 이후 조선화는 날로 김용준이 우려하던 비속화 현상이 일어났다.

채색의 과도한 사용은 왜 유화가 아닌 조선화인가라는 의문을 일으키게 했고, 거의 비슷한 소재 - 전쟁.근로현장.지도자 동지 - 를 반복하는 과정에 나타난 내용과 기법의 상투성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그리고 필치에 주관적 감정을 극도로 배제하다 보니 대상은 냉랭해질 수밖에 없었고, 누구의 그림인가를 따진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판에 박힌 그림들이 난무하게 됐다.

누구는 이를 일러 "이발소 그림 같다" 고 혹평했다.

그러니까 조선화의 이상 (理想)에는 잘못이 없었지만 그것의 시행과정을 보면 사안을 너무 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조선화의 무궁한 가능성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부분만 획득한 셈이다.

그것은 북한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간취되는 현상이기도 했다.

결국 북한의 조선화는 중국의 농민화, 미국의 소수민족 벽화, 남미의 나이브 페인팅처럼 어느 제한된 범위에서는 독특한 위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조선화의 전부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40년 전에 김용준이 말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새삼 생생하게 울려온다.

"조선화의 특색은 필묵이 근간이다. … 만일 필묵의 표현을 채색으로 대행한다면 벌써 모필 조선화는 성립하지 못하고 그 의의는 상실하고 말 것이다. "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회는 "북한의 현대 수예"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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