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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7.석주선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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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대담=이은윤 종교 전문위원]

"이제 동서남북으로 돌아가, 깊은 밤 바위 위의 흰 눈이나 함께 보세 (東西南北歸去來 夜深同看千岩雪)" .설두중현선사 (980 - 1052)가 한국 선방에서 많이 드는 화두의 하나인 '이뭐꼬 (是什磨)' 를 평석한 말후구다.

설두는 여기서 인간은 각자의 천품에 따라 할 일도 각기 다르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자각해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90평생에 처음으로 충남 온양 현충사 입구 금병산에 복지불사로 양로원과 보문사라는 절을 창건하고 있는 서울 칠보사 조실 석주 (昔珠) 노장 (90) 을 찾아가는 설중의 여정에서 떠올려 본 선화 (禪話) 다.

선객입네 하고 공연히 언제까지 운수 (雲水) 의 여로나 헤맬 필요는 없다.

평등과 차별, 생과 사 (死)가 동일하다는 명암일여관 (明暗一如觀) 을 확립, 분별심을 여의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면 '날마다가 좋은 날 (日日是好日)' 을 살아가는 도인이 아닐까 싶다. 혹한의 북풍을 가르며 흰 눈 덮인 바위 밑에 살고 있는 노장 (老長) 을 찾은 이유도 바로 이런 삶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문 : 무슨 화두 (話頭) 를 들고 계십니까.

답 : '삼베 서근 (麻三斤)'

문 : 화두를 타파하셨습니까.

답 : 대낮에 웬 잠꼬대냐.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하고 엄정한 관청의 공문에 비유, 공안 (公案) 이라 했던 화두 (話頭) 는 도를 깨우치려는 지극한 가르침을 말한다. 따라서 화두란 직역하면 '이야기' , '담론' 이고 구체적으론 유명한 선문답이나 방장의 상당법어에 붙인 시.소설.신문기사등의 제목과 같은 것이다.< p>

선승들은 전 생애가 하나의 공안이며,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진정한 삶을 누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운문종의 동산수초선사 (910 - 990)가 한 중으로부터 '불법이란 무엇인가' 를 질문 받고 대답한 '삼베 서근' 이라는 화두는 일상생활 속의 평등 (마) 과 차별 (서근) 을 드러내 평상심의 삶을 설파한 격외 (格外) 의 화두다.

옷감으로서의 삼베는 똑같은 평등이지만 각자의 체격에 따라 옷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삼베는 3근.4근.5근으로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한벌의 삼베옷이 됐을 때는 평등과 차별이 하나가 돼 '삼베옷' 이라는 한 물건일 뿐이다.

동산은 지금 입고 있는 자신의 삼베옷이 다른 사람들 것과 똑같고 무게도 3근에 불과하지만 옷안의 사람 인격은 각자가 다르다는 점을 빗대 자신을 부처로 제시, 질문자가 생각하는 허상의 부처를 단호히 배격한다.

선은 이처럼 극히 상식적인 일상생활 속에 있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기차게 뛰어넘는다. 석주노장의 말후구 (末后句) 는 한마디로 아직 깨치지 못했다는 '겸손' 이며 신앙고백이다.>

문 : 삼세제불 (三世諸佛) 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답 : 어미 돼지 등어리다.

<자심 (自心) 속에 빛나고 있는 신령한 빛에 의지해 깨달으라는 얘기다. 외부를 향해 부처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낡은 쟁기 보습으로 밭을 가는 꼴이다. 그래서 선은 종이 조각에 불과한 경전이나 달달 외우는 것을 극구 반대한다.< p>

새끼들이 즐겁게 타고 노는 어미 돼지 등어리를 평등의 태양빛만이 내려쬐는 심전 (心田) 으로 비유한 것이다. 달그림자를 붙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은 원숭이와 같은 꼴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미 돼지 등어리를 잘타고 놀아야 한다.>

문 : 거울이 빛을 발한 다음은 어떻습니까.

답 : 깜깜하다.

<거울은 젊은 여자가 나타나면 여자를, 늙은 할머니가 오면 할머니를 비춘다. 대도 (大道)가 펼치는 우주세계의 낮은 태양, 밤은 별을 볼수 있게 한다. 마치 거울의 광학 (光學) 작용과 똑같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낮에는 해를 보고, 밤에는 보며 산다. 거울은 피사체를 거짓말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순종' 의 전형이다.< p>

순종할 뿐인 거울의 뒷면은 언제나 깜깜하다. 이러한 거울의 순종은 무명.아둔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선에서는 깜깜한 암흑은 진리를 상징, 부처의 바탕이 되는 본연자성 (本然自性) 을 가리킨다.

선의 불이법 (不二法)에서는 무명은 곧 명 (明) 의 씨앗이고 아둔함이 부처가 되는 첩경이다. 이것이 바로 선이 강조하는 어리석은 척, 미친 척하는 치둔 (癡鈍) 의 철학이고 풍광 (風狂) 의 철학이다. 그래서 무명과 아둔함처럼 보이는 거울의 순종 뒤에 있는 암흑은 부처의 씨앗인 자성을 가리킨 역설이 된다.

문 : 불법은 지극히 오묘하다는데 일상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익혀야 할까요.

답 : 둘이 아니다.

<동아시아 선불교의 사실상 창시자인 6조 혜능대사 (638 - 713) 는 "불법은 원래부터 세간속에 있다 (法元在世間)" 고 설파했다. 일상생활과 불법생활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p>

선의 핵심인 '불이법' 이란 모든 것이 뿌리로 돌아가면 하나라는 만물일체사상 (萬物一體思想) 이다. 그래서 선은 재가와 출가 (出家) ,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어 구분하는 어리석음을 '밥 광주리 속에 앉아 굶어 죽는 사람 많고, 바닷가에 앉아 목말라 죽는 사람 많다' 고 질타한다.

부처와 중생의 성품 자체는 전혀 다름이 없고 똑같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일심 (一心) 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부처와 중생이지만 다만 자기 성품의 청정성을 상실했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성인과 범인이라는 다른 인격이 되고 만다.

선은 당일.당시 (當時)가 절대고 이를 소홀히 하면 인생도 불도도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 날마다의 일상생활에 충실할 것을 가르치는 생활철학이기도 하다. 빈부.귀천으로 구분하는 분별심만 버리면 오묘한 경지가 되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선리의 알파이며 오메가다.>

문 : 뜻밖에 깨달은 사람을 만나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답 : 회대도 (會大道 : 대도를 구현하라).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 구극의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 을 깨친 도인에게도 아직 보살행을 통한 진리의 실천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성불 (成佛)에만 도취돼 열반에 안주하고 깨달음은 사선 (死禪) 이고 총각이나 꾀는 처녀 귀신이다. '회대도' 는 참으로 선사들이 누누히 역설해온 불법의 세속적 실천을 촉구한 일할 (一喝) 이다.>

문 : 세계는 어느 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 네놈의 마음이 풍족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원래 이 선문답은 운거도응선사와 한 장군이 주고 받은 문답이다. 장군이라는 무인은 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급급하고 무한한 정복의 야망에 불타는 번뇌의 화염에 휩싸여 있게 마련이다. 인류평화는 그러한 욕심에 인간의 공리심이 사라질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얘기다. 언어문자라는 것부터가 공리적이다.< p>

엄격히 말해 언어나 문자는 이미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순간 자신을 합리화하고 자신의 욕망을 호도하는 공리적 계산을 깔고 있다는게 선의 언어문자관이다. 그래서 선은 심오한 불법진리를 말로서는 표현 불가능한 불가해 (不可解) 의 영역으로 간주, 침묵이나 '모른다 (不識)' 는 말로 대답한다.

아마도 석주노장은 기자에게 언어문자의 한계성을 똑똑히 인식, 기사를 쓰는데 최대한의 공정성을 가지라는 충고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속에는 기자들이 붓끝을 잘못 놀려 세상이 평화롭지 못하다는 비판적인 원망을 담고 있는 듯도 했다.>

문 : 공겁 (空劫) 속에서는 누가 주인입니까.

답 : 내가 여기에 있다.

<질문은 '모든 존재가 괴멸된 세계에서도 부처는 존재하는가'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주 철학적인 물음이다. 노장은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절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경지를 '내가 여기에 있다' 는 한마디로 자신있게 제시한다.< p>

석가모니의 게송 '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 도 바로 이런 절대 자유의 자기 주체성을 밝힌 사자후다. 석주노장은 흰 눈이 흩날리고 있는 온양 장자못 가의 보문사 양로원 구석방에서 눈 덮인 바위를 바라보며 필례금 (筆禮金) 을 모아 남은 불사비에 보태고자 선필 (禪筆) 의 붓글씨나 쓰고 있는 자신을 당당하게 내세웠다.

이는 성과 속이 둘이 아닌 일상의 본심 자리에서 상.락.아.정 (常樂我淨) 이라는 열반 구경의 4덕 (四德) 을 닦고 있음을 과시한 것이기도 하다. 선이 지향하는 종착점은 이처럼 각자가 자기 능력에 맞는 본분사 (本分事) 를 열심히 행하면서 어떠한 후회도 남기지 않고 살아가는 날마다의 일상생활이다.

산다는 게 별건가. 석주노장은 젊은 시절 금강산 마하연.해인사.오대산 선방을 찾아 참선하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회한 없는 조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 : 입적하신 뒤 누가 스님의 종지 (宗旨) 를 물으면 무어라고 할까요.

답 : 채소밭의 채소가 날이 가물어 시들면 물을 길어다 밭고랑이 축축하도록 뿌려준다.

<역시 지극한 불법을 평상의 일상생활 안에서 펼치고 있는 노장의 평상자연 (平常自然) 은 순박하기만 하다. 거창한 관념적인 형이상의 용어를 구사하는 법문 보다 한참 위다. 가뭄으로 죽어가는 채소에 물을 길어다 주어 살리는 일상적인 일은 대승불교가 그처럼 중시하는 불살생 (不殺生) 의 계율을 실천하는 '불법의 육화 (肉化)' 요, '행동하는 말씀' 이라 할수 있다.< p>

이렇게 평범속에서 비범 (非凡) 을 보이는 것이 선의 진정한 불도 실현이다. 진리는 바로 발바닥 밑의 흙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노장의 본한자재 (本閑自在) 한 삶을 엿보고 난 기분이 흐뭇해서 온양 시내에 나와 송이송이마다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고 내려앉는 곳이 제자리가 되는 눈송이들을 벗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다 상경했다.>

*** 석주선사는

▶1909년 경북 안동 출생▶1923년 선학원에 출가▶1928년 부산 범어사서 득도▶1933년 범어사 강원 대교과 졸▶1936 - 39년 오대산 상원사.금강산 마하연.덕숭산 정혜사.묘향산 보현사 선방서 안거▶1953 - 84년 은하사.불국사.봉은사.은해사.관음사 주지▶1959년 범어사서 대덕법계 품수▶1961년 선학원 이사장▶1965년 칠보사 조실▶1971 - 84년 불교 조계종 제7, 17대 총무원장▶1980년 초대 승가대학장▶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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