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30·끝 엄원태 → 송재학 시집 『진흙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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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송재학의 여섯 째 시집 『진흙 얼굴』은 2005년에 나온 그의 최근 시집이다. 근황부터 미리 말하자면, 그는 두어해 전부터 다시 매우 치열한 시작활동을 재개하여 무려 사십여 편의 신작을 한 해에 쏟아내듯 발표하기도 하였다. 작년에는 그 결실인 듯, 가편(佳篇) ‘늪의 내간체를 얻다’가(그는 이 시를 “받아썼다”라고 표현했다) 현역 시인들과 평론가들의 최다 추천을 받음으로써,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시’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미발표 시들을 포함하여 족히 시집 두어 권 분량의 원고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집 같은 건 내도 그만 안 내도 그만이라는, 별 관심 없다는 투다. 놀랍게도 그는, 잠시도 쉴 틈 없는 격무에 지친 일과를 끝내고서도 바로 귀가하지 않고, 가까운 독서실로 가서 두어 시간을 순전히 초고작업에만(퇴고작업은 이른 아침이나 업무 중 틈틈이 한다 했다) 몰입하곤 한다는 사실을 내게 털어 놓았다. 시를 마치 대입시험 공부하듯 쓰는 시인이라니! 그런 와중에도 그는 지난 겨울부터 아날로그 오디오에 심취해 그만의 빈티지 시스템을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완성했다 한다. 가히 초인적이라 할 집중력과 근면함이 아닌가.

이런 그도 시집 『진흙 얼굴』이후, 한동안 책을 버리고 시작(詩作)을 작파하다시피 한 적이 있다. 자연스레(?) 두문불출 칩거도 이어졌다. 염려의 마음으로 찾아간 가까운 친구들에게, 그는 순전히 자신의 시학에 대한 회의와 자괴에서 비롯된 결단이라 했다. 근원적으로 그의 시는 ‘송재학표’ 언어세공 감각만이 가 닿을 수 있는 섬세함의 한 극점 같은 것이어서, 오히려 그만큼 더 예민하고 다치기 쉬운 것이기도 했다.

시집 『진흙 얼굴』이 나왔을 때도, 시기적 여건이 좋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 흔한 서평 하나 변변하게 나온 게 없이 초라하게 넘어갔다. 하지만 『진흙 얼굴』은, 송재학의 주객일치 감각 차원이 마침내 주체-대상의 구분을 허무는 지경에 이르러, 주체를 대상 속으로 ‘물아일체’의 경지까지 밀어붙이는 시적·미학적 응전력을 보여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집임에 틀림없다. 그의 시들이 뒤늦은 보상이나마 제대로 평가받게 되길 기대해 본다. 당연히, 이미 그는 그런 보상이나 평가 같은 것엔 관심이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엄원태(사진)=1955년 경북 대구 출생. 90년 계간 ‘문학과 사회’로 시 등단. 시집 『침엽수림에서』, 『소읍에 대한 보고』, 『물방울 무덤』등이 있다. 대구시협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엄원태 시인의 글을 마지막으로 ‘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시리즈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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