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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각언론사 신춘문예 경향]시대아픔 짙게 투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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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축제가 끝났다. 신년벽두 각 일간지를 장식하는 부문별 신춘문예 당선작은 당선자들이 본격적 문학여정에 올랐음을 알리는 지상 출범식이자 축제다.

세계에 유래없는 이같은 등단제도를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문화의 지주" 라고, 혹자는 시대의 흐름과 문학의 요구를 읽는 창 (窓) 이라고 부른다.

시대 탓일까. 사상최대 응모편수를 기록한 올해 이 창 밖에는 고통과 죽음이 강하게 어른거렸다. 단편소설 당선작을 보자. 청산가리가 든 라면으로 딸을 죽이려던 어머니가 폭식증 끝에 자살하고 마는 '소인국' (중앙일보) , 교통사고로 숨진 부모의 기일에 두 형제가 놀이동산에 놀러가 여자와 사귀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 (한국일보)에는 공통적으로 육친 살해욕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집을 버린 남편과 딸을 동일시하는 선상에서 어머니는 딸을 죽이려고 시도하고, 부모의 죽음을 소파 위에 누워 맥주를 마시는 자유와 동일시하는 아우는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형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

'거리 위 작업실' (중앙일보) 같은 희곡 당선작에도 등장하는 이같은 살해욕구는 삶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공격적 태도를 보여준다.

반면 삶에 대한 외경을 보여주는 죽음도 있다. '다비식' (조선일보)에서 주인공 노파는 남편의 첩과 함께, 그 아들의 부양을 받으며 살아온 굴곡 많은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길을 택한다.

자의건, 타의건 죽음이 빈번히 등장하는 이같은 경향에 문학평론가 김치수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는 "아픔의 현상학" 이란 이름을 붙인다. IMF전후 우리 시대가 주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구체화된 방식이란 것이다.

사회적 아픔을 공격하면서 개인 내면의 아픔이 해소돼었던 80년대말과 달리 '싸울 대상' 이 없는 90년대말은 공격적인 무의식이 가족 혹은 자신을 향하게 됐단 해석이다.

이같은 공격성의 대상인 가족관계는 대부분의 당선작에서 정서적 유대와 안정을 제공하는 대신 불안정과 해체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레고로 만든 집' (동아일보) , '다시나는 새' (문화일보) , '숫자세기 ' (세계일보) 등이 모두 근경 (近景) 이든 원경 (遠景) 이든 '가족의 위기' 가 밑그림에 걸린다.

이같은 위기가 어디로 갈까. 당선자들이 한해살이 풀이 아니라 다년생 나무로 문단에 뿌리박은 후, 혹은 기성 작가들에 의해 위기의 정체와 극복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치열한 경선인 만큼 올 신춘문예에도 예비문인으로서의 몰양심이 드러났다.

'눈치작전' 이든 '배짱지원' 이든 합격만 하면 되는 입시 (入試) 처럼 신춘문예를 치르는 일부 응모자들이 그것.

올해 신춘중앙문예 시부문에 '강은창' '최경민' 두 이름으로 한 사람의 작품을 나눠보낸 것이 그 한 예. 이름뿐 아니라 주소와 전화번호를 각각 달리 적는 용의주도함으로 심사과정에서부터 요주의 대상이 된 이 응모자는 최종심까지 올랐다 '문학하는 자세가 틀렸다' 는 당연한 이유로 낙선됐으나 타지 신춘문예 당선사실이 확인돼 신춘문예 제도 자체에 씁쓸한 뒷맛을 남기게 했다.

잘 쓰든 못 쓰든 자신과 삶과 사회를 원고 앞에서 경건하게 돌아보는 정신과 양심의 경연의 장을 마련, 삶과 사회를 참으로 인간답게 가꾸는게 신춘문예의 존재이유다. 뻔뻔스런 사람은 신춘문예에 접근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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