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까지 속여라, ‘삼십육계’의 첫 계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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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의 고향으로 알려진 중국 산둥(山東)성 빈저우(濱州)시는 관광객을 위해 ‘손자병법성(孫子兵法城)’을 만들었다.

당 태종 이세민의 이야기다. 수도인 장안(長安)을 출발해 동쪽의 고구려로 향하던 대군의 행렬은 바다를 눈앞에 두고 멈춰 섰다. 이세민 본인이 대군을 이끌고 망망대해를 건너야 하는 상황이 몹시 우울했던 모양이다. “이를 어찌할까….” 고민에 빠진 이세민에게 누군가 나선다. “폐하, 먼저 술을 한잔 드시면서 생각하시는 게 어떠실지?” 걱정에 빠져 있던 이세민은 그를 따라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그가 다다른 곳은 화려한 장막이 드리워진 어느 집. “제가 오늘 폐하를 모시겠습니다”고 하면서 나타난 맹장 설인귀. 일행은 그 속에서 술과 안주를 즐긴다.

그러다 갑자기 집이 흔들린다. “어떻게 된 것이냐?”는 물음에 장막 밖으로 나갔던 신하는 그만 놀라고 만다. 커튼 바깥은 바로 바다였던 것. 장막으로 두른 집은 사실상 한 척의 거대한 배. 바다를 건너기 주저했던 황제를 파티 장소로 가장한 배에 모시고 앉아 편하게 술과 음식을 즐기도록 한 뒤 바다를 건너려고 했던 설인귀의 꾀다.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삼십육계(三十六計)』에 등장하는 첫 계략이다. 그 이름은 ‘만천과해(瞞天過海)’. 뜻을 풀어 보자면 ‘하늘을 속이고서 바다를 건너다’라는 의미다. 하늘은 바로 천자(天子), 즉 황제다. 그를 편안한 곳으로 유인해 바다를 건넌다는 원래의 목표를 완수한다는 내용이다.

중국인의 일상에서 보이는 모략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삼십육계』에 처음 등장하는 책략이라서 이 말에 담긴 의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단 바다를 건너 전쟁을 수행하는 게 우선의 목표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담대한 기만술을 쓴 것. 그러나 그 대상이 지고지상(至高至上)의 천자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테면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하늘 같은 황제도 속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미리 상정한 목표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배짱이다.
한국인이 흔히 ‘줄행랑치다’와 동격으로 받아들이는 삼십육계의 시작은 이렇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고상한 존재도 속여 넘길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그 서두가 심상치 않다.

이 책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淸)대에 들어와 민간에 유포되는 기발한 모략들을 집대성해 만든 책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충고로 시작하는 이 책의 큰 줄거리는 결국 속임수와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드는 교묘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첫 부분은 비교 우위의 전력을 갖춘 상태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승전계(勝戰計)’다. 남의 칼을 사용해 상대를 제거하자는 차도살인(借刀殺人), 다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변죽을 울려 상대방의 이목을 그곳으로 모은 뒤 마지막에는 서쪽을 치라는 내용이다. 상대방에게 심각한 착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을 공황 상태에 빠지게 한 뒤에 공격하라는 것.

상대와 비슷한 전력을 갖춘 상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을 ‘적전계(敵戰計)’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일단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이른바 무중생유(無中生有)다. 시냇물에 뿌연 가루를 많이 섞어 흘려보냄으로써 밥을 지어 먹는 아군의 병사가 압도적으로 많게끔 보이도록 하는 착각 유도의 방식이다. 웃음 속에 칼을 감추라는 소리장도(笑裏藏刀)도 등장한다.

모두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사술(詐術)이자 편술(騙述)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해보다가 결국 안 된다면? 그 다음이 바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계책, ‘튀는 게 최고(走爲上)’다. 이쯤으로 보자면 삼십육계는 사기와 기만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책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속이거나, 남의 빈 곳을 역이용하고, 착각과 착시를 통해 남을 혼란에 빠뜨리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언뜻 삼십육계를 애용하는 중국인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사기꾼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사기와 기만이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부류를 동원해 남의 허점이나 이용하는 게 중국인일 것이라는 오해를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만 살펴본 결과다. 앞 편에서 언급했듯이 손자(孫子)의 병법은 적을 기만하고 속이는 편술(奇)과 함께 정규 병력의 양성과 전투물자의 충실한 준비 등을 상징하는 정(正)을 함께 중시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현실 생활의 여러 측면에서는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삼십육계식’의 사고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원칙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 일단 원칙이 서면 이를 함부로 허물지 않는다. 중국 정부의 정책이 특히 그렇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제창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인 시스템이다. 사회주의는 중국의 원칙이다. 그 하부는 시장경제다. 중국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혼합을 이런 식으로 극복한다. 정치적으로는 구태의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중국 나름대로의 사회주의 모델을 유지하고, 경제적으로는 그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시장을 갖다 붙였다. 원칙을 유지하면서 현실적으로는 뒤처진 경제를 끌어올리기 위해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지켜보는 오늘날의 중국 모습 그대로다.

모략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이런 원칙과 함께 구성된다. 편술과 사술은 그 일부다. 정(正)과 기(奇)가 한데 어울려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게 모략의 세계다. 얼굴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행동에서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조화가 나타난다. 그래서 중국인의 속내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 심리 작용의 근저를 잘 아는 게 중요하다. 그러지 못하면 강하고 큰 중국에 눌리기 십상이다. 손자가 말한 명구가 있다. “나를 알고 남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지지 않는다(知己知彼, 百戰不殆)”. 오늘날의 한국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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