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10·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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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어 쓴 ‘세상에 확실한 게 뭐 있나’
시 - 조연호 ‘고전주의자의 성’ 외 12편

평론가 권혁웅씨는 “미당문학상 예심위원들은 최종심 후보 시인 10명의 면면이 한국 현대시의 스펙트럼을 충실히 반영하도록 작업 경향별 안배를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조연호는 ‘난해시’의 선두 주자”라고 했다. 중략하고 남은 부분만으로도 그런 면모는 짐작할 수 있다. 그나마 ‘고전주의자의 성’은 짧은 편이다. 4000자가 넘는 ‘맹지’ 같은 시는 맥락을 알 수 없는 성채 같다.

조연호(40·사진)씨에게 ‘해명’을 부탁했다. 네 번째 행 “내가 그대에게…”는 ‘나는 나가지 않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라는 뜻이란다. 왜 비틀어서 쓰는 걸까. 조씨는 “시가 한 가지만을 의미하도록 분명하게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런 시론(詩論)의 바탕에는 “이 세상에 확실한 건 뭐가 있느냐”는 생각이 깔려 있다. 가령 타인은 날마다 제대로 아는 데 실패하는, 대표적인 대상이다.

조씨의 시는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있다”는 평가다. 읽는 법이 여러가지일 게다. 권혁웅씨가 추천하는 독법. “하루에 한 두 편 만 읽되 가능하면 느릿느릿 소리를 내며 읽어라. 자주 쓰이는 몇 가지 상징을 이해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조금 편해진다.” 시는 시간을 투자해 반복해서 씹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고전주의자의 성

부인이 괄태충처럼 사라질까봐 두렵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산문과 운문을 생의 모든 부분에서 반복했다
회색이 만든 아름답고 슬픈 시대
내가 그대에게 하루에 하나씩의 문밖을 던지던 것에 아직 방문객이 없던 시절
그늘을 잃었고 그날의 그림자를 모두 잃었다
괄태충처럼 사라질까봐 두렵다
하지만 자고 나면 이것이 어떤 잠이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되리라
멀리서 들려오는 타인의 쇼팽에게 먼지를 묻혀주는 밤
보다 더 굵고 긴 악몽에
향기나는 콘돔을 씌우고
아버지와 하녀 사이에 도착하기 전에 비는 죽는다
이 계절에 구름을 위쪽 단추까지 채우고 또 이 계절에
우린 젖은 우리를 풍향계 앞에 꺼내놓고
괄태충처럼 사라질까봐 두렵다
운 없는 어린잎이 현관문을 두드렸어 그런 뒤적이는 소리들이
내 감정의 일부를 성공적으로 부숴놓곤 했다
창에 돌을 던져준 건 고맙지만 창들은 예전부터 깨진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양손 곁에 놓여 있는 더러운 주말은 그렇다면 즐겁다
연금술의 치유력으로 겨울잠을 한 조도(照度) 포기한다
괄태충처럼 사라질까봐 두렵다
쓸쓸하게 녹아 없어진 초의 개수를 매일 밤 처음부터 다시 외워보며
그대도 나처럼 신비한 불결을 향해 잠들어라

-'문학동네' 2008 겨울호

신준봉 기자

◆조연호=1969년 충남 천안 출생. 94년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저녁의 기원』 『죽음에 이르는 계절』.

웃기면서 날카로운 …“딱 전성태스럽다”
소설 - 전성태 ‘이미테이션’

소설가 전성태(40·사진)씨의 후보작 ‘이미테이션’(‘문학과사회’ 2008년 겨울호)에 대해 한 예심위원은 “딱 전성태스럽다”고 평했다. 고유명사(전성태)를 ‘보통명사화’시키는 전씨 작품의 힘과 특징은 과연 뭘까.

명품이라면 ‘짝퉁’도 좋다는 허영심, 영어 교육 광풍(狂風), ‘미국 혼혈’이 대접받는 세태 등 한국 사회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소설은 ‘이미테이션’이라는 한 단어 아래 싸잡아 그려낸다.

소설의 압권은 특이한 외모 때문에 혼혈로 오해돼 평생 멸시받으며 자란 ‘한국 토종’ 남자가 징병 신체검사 장소에서 군 면제를 요청하는 대목. 혼혈인 군 면제 규정을 지레짐작으로 적용하려던 병무청 직원은, “혼혈 같은 외모 때문에 정상적인 군생활이 불가능할테니 빼달라”는 남자의 요청에 오히려 남자가 면제 대상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남자는 물론 징집된다. 하지만 세태가 바뀌면서 언제부턴가 같은 혼혈이라도 ‘국내산’은 차별받지만 미국 동포는 대접받게 된다. 이런 점을 간파한 남자, 이름을 게리로 바꾸고 과거 뉴요커였던 것으로 개인사도 철저하게 ‘세탁’한다. 이제 그는 강남을 선호하는 지방도시 영어학원에서 없어서는 안될 네이티브 강사다.

혼혈 차별이라는 우리 사회의 맹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지만 전씨는 이를 웃음으로 포장한다. 전씨는 “내 작품의 웃음은 해학”이라고 말했다. “비정한 현실이 바탕에 깔려 개그나 유머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씨의 외모, 심상치 않다. 그는 “어려서는 ‘미국놈 튀기’, 자라서는 ‘동남아 노동자’란 놀림을 받곤 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자신의 얘기이기도 한 것이다. 동료 소설가 천운영씨의 표현대로 소설은 “수줍은 듯 당당하고, 의뭉스러운 듯 순박하다.” 이런 게 ‘전성태스러움’일 것이다.

신준봉 기자

◆전성태=1969년 전남 고흥 출생. 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국경을 넘는 일』,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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