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옷을 벗었다, 도시는 알몸이 되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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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장치는 없었다. 옷도 입지 않은 채였다. 굵은 철사줄을 잡고 가까스로 서 있으면 맨해튼의 지하철이 지날 때마다 다리가 출렁였다고 한다. 김씨가 카메라의 위치를 잡고 노출 등을 설정한 후 제 자리로 걸어나가면 뒤에 있던 동료가 셔터를 눌러줬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지하 묘지를 탐험했다. 총 297㎞에 이르는 지하 묘지를 훑었다. 이 중 관광객에 공개된 약 1.6㎞ 구간은 김씨의 관심 밖이었다. 대신 비밀스럽게 뚫린 구멍으로 숨어들어갔다. 몇백년 된 뼈 무더기 위에 옷을 벗고 누운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브루클린의 버려진 설탕 공장, 디트로이트의 화려했던 시절을 보여주는 극장의 폐허가 된 현재, 신식 기차 선로가 들어오면서 폐기된 옛 철로 등이 김씨의 무대다.

그가 이처럼 거대 도시의 버려진 부분, 흉측한 쓰레기가 된 건물,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곳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2005년. 24세 젊은 여성이 혼자 카메라를 짊어지고 스산한 곳을 찾아다닌 까닭은 뭘까.

거대한 도시 한 모퉁이에서 옷을 벗은 작가 김미루씨의 모습은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낸다. 구정물에 발을 담그고 버려진 뼈 위에 눕는 그는 상투적인 에로티시즘을 경계한다. [갤러리현대 제공]


◆익숙한 도시의 낯선 모습=“비둘기의 깃처럼 푸른 돔과 우아한 금속 격자에 반했다.” 김씨가 맨해튼 다리를 기어 올라간 첫번째 이유다. 새벽 3시 촬영을 끝내고 내려왔을 때 머리 위에는 뉴욕 경찰의 헬기가 떠있었다. 다리를 열심히 ‘등반’하고 있는 그를 수상하게 본 누군가 경찰에 신고한 것. 하지만 김씨는 유유히 다리를 내려와 조용히 집에 돌아왔다. 법에서 출입 금지한 장소를 숱하게 다녔지만 한번도 잡히지 않은, ‘잽싼’ 탐험가다.

“지상에서만 보던 상투적 도시 말고 높은 곳에서의 모습, 그리고 시간을 결합해 4차원의 새로운 도시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것이 맨해튼 다리에 올라간 또 다른 이유다. 이처럼 그는 도시의 일부분을 낯선 장소로 만든다. 필라델피아에서는 버려진 발전소에 들어가 고철 덩어리를 껴안고 사진을 찍었다. 서울의 모래내에선 곧 헐릴 가정집의 지붕에 앉았다. 도시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잊어버렸던 장소를 되살리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 정신분열증 노숙자가 사는 곳, 살해된 마피아의 시체가 버려진 곳을 용감히 누빈다.

◆도시에 사로잡힌 인생=도시는 그가 어려서부터 마음을 쏟았던 주제다.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떠난 것도, 컬럼비아 대학에서 불문학을 선택한 것도 모두 도시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 미국 케임브리지에 잠시 다녀온 후 그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혼자 미국으로 가겠다는 12살 딸을 부모가 허락할 리 없었다. 2년 동안 설득했다. 그의 아버지는 철학자 도올 김용옥(61)씨다.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할 때도 프랑스 파리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도시는 김씨 평생의 주제다.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전공한 것은 회화. 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도시의 모습을 포착하는 데에는 사진이 적합한 매체였다”고 한다. 600만 화소짜리 ‘소박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만, 도시와 문명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용감한 시도는 신진 작가 이상의 것이다.

김호정 기자

◆김미루, ‘나도(裸都)의 우수(憂愁)’전=8월 25일~9월 13일.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 02-519-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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