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治世를 배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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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795년 윤이월 9일 묘정 (卯正) 3각 (6시45분경) , 세번째 북이 울리자 왕은 융복을 입고 모자에 깃을 꽂고 가마를 타고 돈화문까지 나와서 자궁 (慈宮.어머니) 을 기다렸다. 자궁은 영춘문.천오문.진선문을 거쳐 돈화문으로 나왔다. 왕은 자궁과 인사를 나누는 의식을 치른 뒤 말을 타고 출발했다. " 서울대 한영우 (韓永愚) 교수가 쓴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은 이렇게 시작한다.

화성 (華城.지금의 수원) 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해 화성과 현릉원에 다녀온 뒤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 라는 행차보고서를 만든다.

이를 韓교수가 현대식으로 재구성한 것이 이 책자다.

의궤 (儀軌) 란 요즘식 일종의 애니메이션이다.

왕을 수행했던 인원 1천7백79명의 인물과 7백79필의 말까지 생동감 있게 빠짐없이 그림으로 그리고 중요인물의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다.

매끼 제공된 식사 내용과 그릇 숫자까지 적혀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한 역사의 상상력 여행을 즐기는 기회를 가졌다.

저자는 행차 길목마다 오늘의 시가지와 대비시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한편의 소설 같은 이 역사기록은 역사의 대중화와 아울러 우리에게도 이처럼 편안했던 치세의 역사가 있었음을 일깨우는 또 다른 감회를 준다.

일치일난 (一治一亂) 이라 했다.

평화로운 치세 (治世) 와 환란의 난세 (亂世)가 순환하는 것이 역사라고 보는 관점이다.

개인사든 가족사든 국가사든 일치일난은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각박하고 고달픈 현대사를 허겁지겁 달려온 우리에게 있어 평화의 시대, 행복한 나날이 언제 있었던가.

고달픈 지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오늘, 난세의 시대가 가고 치세의 평화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나 혼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치세의 역사인가.

화합과 사랑이 충만한 정치다.

정치지도자에게 있어 화합과 사랑의 정신은 한 시대를 치세와 난세 중 어디로 이끌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덕목이 된다.

정조를 보자. 아버지 사도세자는 당시 정치의 고질적 화근이었던 당쟁에 휘말려 뒤주속에서 생죽음을 당한 대표적 정치 희생물이었다.

억장이 무너질 천륜의 한을 그는 결코 정치보복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천하의 인재를 규장각에 모아 지혜의 보고로 삼았고 학맥.인맥.지맥을 떠난 고른 인재등용으로 당파를 멀리했다.

원한보다 애민 (愛民) 의 정치를 택했고 보복보다는 화합을 중시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는 어떠했는가.

일난 (一亂)에 일난을 거듭한 나날이었다.

권위주의 시대가 지나면 또 다른 폭압정권, 보통사람의 시대에 문민시대가 열린다 했지만 5년단위 혁명과 압박으로 지낸 난세의 연속이었다.

역사는 계속될 뿐이다.

어제의 역사가 오늘의 역사고 오늘의 치세가 내일의 발전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한 채 우리 정치지도자는 치세의 화합보다는 난세의 영웅이 되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난세의 지도자는 정치의 투명성과 공개성을 거부한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자신의 족적을 지우기에 급급하다.

치적의 역사가 아니고 난세의 족적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조를 보라. 그는 기록을 통해 정치의 투명성과 공개성을 확보하려 했다.

음모의 정치를 배제하고 토론의 정치와 투명한 정치경영을 폈다.

기업의 공개성과 투명성이 정확한 재무제표에 있듯 정치의 투명성도 기록문화의 정확성에 달려 있다.

치세의 정치는 정치의 투명성과 직결된다.

내각제를 위한 이면합의나 이를 둘러싼 선문답 식의 음모성 정치대화, 총풍.세풍.사정풍으로 점철되는 돌개바람식 정치는 결코 치세의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이젠 난세의 영웅을 기대하지 않는다.

치세의 화합과 사랑의 정치를 갈망한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TV 연속사극이 난세의 역사를 충동질하고 난세의 영웅을 미화시킨다.

마치 우리 역사엔 치세의 정치가 없고 난세의 정치만 존재한 듯 착각케 한다.

이 때문인가.

오늘의 정치에는 치세의 화합 정치지도자는 사라지고 난세의 영웅들만이 살아남아 음모의 정치판을 벌이고 있다.

혼란과 갈등을 조장할지 모를 내각제를 거론하고 약속 준수를 외쳐댄다.

정권 교체때마다 5년단위 혁명을 내걸고 국민을 불안케 한다.

우리의 정치가들은 치세의 정치보다는 난세의 정치에 너무 익숙해 있다.

이제 일난의 시대를 거두고 일치의 시대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 정조를 배우고 치세의 정치를 만들어 내자. 난세의 시대를 벗어나 치세의 정조 르네상스를 재현하는 희망을 새해에 걸어 보자.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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