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풍 교수의 기묘년 '토끼해' 토끼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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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일월신 (日月神) 외에 주위의 동물도 초자연적인 영력 (靈力) 을 가진 것으로 믿어 숭배하고, 그들의 행동을 교훈삼아 왔다.

그런 생각이 발전한 것이 바로 '띠' 다.

98방콕아시안게임 마스코트로 코끼리 '차이요' 를 내세웠던 태국은 잘 알다시피 코끼리를 숭배하는 나라다.

이 나라에도 우리처럼 '띠' 라는 개념이 있고, 우리에게 없는 코끼리띠가 있다.

몇년전 필자가 중국 소수민족의 생활을 관찰하러 갔을 때는 개미띠를 가진 민족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개미의 근면성을 교훈삼아 띠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12간지에 해당하는 동물들은 하나같이 본받아야 할 덕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선조들은 99년의 주인공 토끼의 어떤 점을 본보기로 삼았을까. 예로부터 토끼는 타인을 존중하고 자애로우며 누구에게나 호감이 가는 기품을 지닌 동물로 여겨졌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한비자 (韓非子) 는 "무릇 행정가는 재능이나 권력보다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나서서 무엇인가를 하게 만드는, '토끼같은 덕' 이 중요하다" 고 말할 정도였다.

토끼는 또 귀가 커서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인품을 가진 영물로 통했다.

이런 이유로 날짐승의 평화론자가 비둘기라면 길짐승의 평화론자로는 단연 토끼를 든다.

토끼를 착하게 여기는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여서 프랑스의 혁명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토끼를 '모든 선 (善) 의 상징' 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착하디 착한 토끼는 서민의 표상이었다.

우리 민화 중에는 커다란 호랑이 앞에서 조그만 토끼가 담배를 피우는, 유머러스한 그림이 있다.

엄한 양반을 상징하는 범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는 토끼의 모습은 평등과 평화를 상징하는 한국적 서민의 참모습이라고 하겠다.

토끼는 또한 희생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옛 이야기 중에는 경북상주의 한 효자가 아버지의 병이 낫지않아 고민 끝에 신령님께 빌었더니 토끼가 나타나 간을 내어 아버지 병을 고치게 했다는 것이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별주부전' 을 통해 알 수 있듯 토끼는 지혜의 화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토끼 해에 태어난 인물에는 지혜롭고 덕이 높은 사람들이 많았다.

신라의 김유신을 비롯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생육신 김시습, 지석영.한용운.안중근.양주동.이은상 등이 모두 토끼띠다.

우리나라에서는 토끼 해에 경사가 많았다.

고구려 태조왕 25년 (서기 77년)에는 부여국 사신이 뿔 세개 달린 흰사슴과 긴꼬리 달린 토끼를 바쳤는데 이들이 상서로운 짐승이라 하여 일대 사면령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또 비록 외적이 침입한 때였다고는 하나 1087년에는 우리 민족 최고의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완성됐고 성군 (聖君) 세종대왕의 치세인 1447년에는 '석보상절' 과 '월인천강지곡' 이 편찬됐다.

역시 토끼 해인 1867년에는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가 완공돼 조선 왕실의 위엄을 삼천리 강산에 떨치기도 했다.

한문 글자모양으로 본 '토끼 묘 (卯)' 자는 새싹이 땅을 뚫고 나오는 모양

이다.

그래서 사마천의 '사기 (史記)' 에서는 '토끼가 만물이 무성함을 상징한다' 고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풍부하다는 뜻에서 토끼 해는 돈 걱정이 없는 해라고도 일컬었다.

그러니 IMF 경제난으로 98년 한햇동안 실직에, 감봉에 돈 걱정을 많이 했던 국민이 시름을 펴는 해가 될 것으로 기대해도 좋겠다.

옛 이야기를 보면 수난은 세 고비를 넘겨야 한다.

위험이 닥치면 풀어보라는 지혜 주머니도 대부분 세개를 전해주지 않던가.

그런데 1999년은 '아홉수' 라는 9자가 한꺼번에 세개나 겹친 해이니 이 해만 잘 지내면 한꺼번에 세 고비를 넘긴 셈이 되어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그날을 바라보며 99년 한해는 토끼처럼 열심히 뛰어볼 일이다.

김선풍 중앙대.민속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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