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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小平이 탐내던 박태준, 나도 데려오고 싶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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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김대중, 김종필, 박태준씨가 1997년 11월 국회 귀빈식당에서 오찬회동을 갖고 DJP연합의 대선 승리 결의를 다지고 있다. [중앙포토]

‘9단’이란 말은 어떤 분야에서 거의 입신에 이른 경지를 말한다. ‘정치9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 별칭이다.

‘김대중 9단정치’의 키워드는 무엇으로 봐야 할까. 그의 족적을 따라가다 보면 타 정파와의 크고 작은 연대에 마주친다. 목숨을 바친 민주화 투쟁이나 평생에 걸친 대권 도전기마다 그는 늘 연대와 연합을 통해 길을 열어나갔다. 딱 한 번 거부한 연대가 노태우 정권과 손잡는 일이었다.

소수파 한계 극복 위해 타 정파와 전술적 연합
김대중 정치는 출발 자체가 연합이었다. 1970년 봄 신민당은 ‘40대 기수론’으로 요동쳤다. 정치 주체를 ‘장로들’에게서 ‘젊은 세대’로 옮겨야 한다는 폭탄선언을 한 사람은 당시 김영삼 원내총무였다. 총재였던 유진산의 대중적 지지가 약했던 탓에 40대 기수론은 40대 대통령 후보자를 찾는 일로 확산됐고, 후보군은 김영삼·김대중·이철승으로 압축됐다. 대세는 깃발을 먼저 든 김영삼이었다.

하지만 신민당 대통령 후보를 경선으로 뽑았던 그해 9월의 전당대회에서 당선 수락 연설문까지 준비했던 김영삼은 그것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1차 투표에선 승리했으나 과반을 넘기지 못해 실시한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이철승과 연대해 김영삼을 눌렀던 것이다. 불과 33표 차였다.

김대중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애널리스트의 연대정치에 대한 분석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숙명적으로 소수파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고향은 호남인 데다, 서민을 대변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애정이 강렬했다. 그런 상황에서 소수파가 헤게모니를 쥐려면 유연한 연합정치가 불가피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에서 ‘의미 있었던’ 연대는 10년 주기로 계속된다.
80년대의 파트너는 이철승과 연대해 ‘물을 먹였던’ 숙명의 라이벌 김영삼이었다.
자택연금 중이던 김영삼의 83년 단식이 계기였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그는 단식 소식을 듣고 깊은 감동과 동지적 유대감을 느꼈다. 그래서 김영삼을 지원하기 위해 ‘뉴욕 타임스’에 지지 글을 기고하고 재미 한국인들과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공조투쟁이 계기가 돼 결성된 것이 민추협이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기 위해 라이벌과 손을 잡은 것이다.

평소 교류가 깊던 하버드대 코헨 박사는 김영삼과의 제휴를 의아해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내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일이라서 김영삼씨가 오히려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라이벌은 그 다음의 일이지요.”

두 사람의 연대는 신민당의 2·12 총선 돌풍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라이벌과의 후보 단일화만큼은 여의치 않았고 80년대의 연대는 분열로 끝난다. 그가 87년 대선에서 주창한 ‘4자 필승론’도 근거 없는 논리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역연합으로 정권교체 이룬 DJP
1990년대 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파트너는 또다시 바뀐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DJP연합이 결성된 것이다.

오히려 분열하는 것보다도 반발이 컸던 연합이었다. 서로 걸어온 길이 다른 두 사람의 연합에 대해 ‘야합’으로 보는 여론이 작지 않았다. 김종필 총재의 지지율이 극히 낮았던 상황이라 대선 득표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부정적 견해를 표출한 국민회의 의원들도 제법 많았다. 그런데도 김 전 대통령은 왜 한사코 DJP연합을 추진했을까. 김 전 대통령이 97년 저서 『나의 삶 나의 길』에서 밝힌 내용이다.

“내가 굳이 연합을 성사시키려고 했던 이유는 ‘지역감정의 타파’에 있다. 자민련은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고 대구경북으로부터 자양분을 얻고 있었다. 정권이 교체되면 이 모든 지역이 정권에 참여하면서 지역감정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또 하나의 사실을 고백한다.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이 일찍이 고백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하나 빼앗아오고 싶은 게 있다면 단연 박태준이라고. 나도 그를 데려오고 싶었다. 나도 젊은 시절 몇 개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적이 있지만 박태준씨는 그런 사업체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경제를 아는 사람이다.”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지역연합을 결성한 그의 도전은 일단 성공했다. 50년 만의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종필·박태준과는 2000년 총선을 전후해 결별하고 만다.

재야·386과 가치 공유한 전략적 연합
김대중 전 대통령이 라이벌 김영삼이나 정체성이 다른 김종필과 손을 잡았던 것은 선거 승리를 위한 일종의 ‘전술적 연합’이었다. 하지만 목적을 이룬 뒤끝은 가히 좋지 않았거나 길지 못했다.

반면 가치를 중시하면서 ‘전략적’으로 연합한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그 대상 그룹 중 하나가 386학생 운동권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DJ가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준 거죠. 우리들의 정치적 어버이라고 보면 됩니다.”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의 말이다.

실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민석 전 의원을 필두로 2000년 총선에 ‘젊은 피 수혈론’을 내세워 송영길·이인영·우상호·오영식·임종석씨 등 386세대를 무더기로 정계에 입문시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거 직전까지 386출신들에 대해 애정이 담긴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얼마 전 민주당 386 출신들의 예방을 받았을 때 김 전 대통령은 이렇게 독려했다고 한다.

“내가 여러분들 데려와 정치시키고, 기대도 큰데 말이야. 당 지지율 낮다고 그렇게 축 처져 있으면 되겠나. 배낭이라도 메고 전국 돌아다니며 고생해야지.”

또 하나의 가치연합 대상은 재야운동권이었다. 고 함석헌·문익환 목사에서부터 김근태 전 의원까지 재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서 우군이었고 인재 수혈의 동맥이었다.

마지막 연대는 노무현?
생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각별한 애정을 보내던 386세대에게 가장 자주 강조하던 메시지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서생(書生)적 문제의식’과 ‘상인(商人)적 현실감각’. 두 가지를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생적 문제의식이란 철학과 가치를 가지라는 뜻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고 있어야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지침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등가적으로 ‘상인적 현실감각’을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의 연합정치는 바로 상인적 현실감각과 직결된다.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김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추구했던 연대가 노무현 전 대통령 측과의 연대였던 것 같다.

김 전 대통령은 서거 전까지 수차례 민주당과 친노세력의 통합을 주문해왔다.
사실 한때 두 사람은 소원한 사이였다. 노 전 대통령 집권 시 대북송금 특검이 시행되며 동교동 측근들이 줄줄이 감옥에 갔고 민주당 내 친노세력은 당을 뛰쳐나와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금이 갔던 관계가 복원된 것은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0·4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면서부터로 보는 사람이 많다.

두 사람은 닮은 듯하면서도 정치 스타일이 달랐다. 비슷한 성장배경에 고집과 지적 호기심이 강하고, 논쟁적·논리적이며, 독서광이었던 점은 비슷하다. 소외계층에 관심이 많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안정적 행보를 보였다면 노 전 대통령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스타일로 인식된다. 결과는 오히려 노 전 대통령 쪽이 좋을 때도 있었다. 각각 재임 중 맞이했던 총선에서 김 전 대통령의 민주당은 원내 1당이 되는 데 실패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신임 정국을 열어 결국엔 과반의석 확보에 성공한 적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평소 “국민보다 딱 반 발자국만 앞서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해 왔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은 정치권 통념보다 두세 발자국씩 앞서 나간 경우도 많았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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