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서 ‘아내의 저린 손’ 주무르고 또 주무른 DJ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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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04면

요단강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1993년 6월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이스라엘 요단강을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이 이 여사의 뻣뻣해진 손을 잡고 주무르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표정엔 이 여사에 대한 염려와 애정이 배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귀국 뒤 정계복귀 수순을 밟는다. [신재형 MAXIM 발행인 제공]

김대중(DJ) 전 대통령 부부가 1993년 6월 이스라엘 요단강을 찾았다.
요단강은 예수가 선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강이다. 크리스천은 ‘요단강을 건넌다’는 말을 ‘이승을 넘어 천국에서 만난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DJ는 92년 12월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한 다음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떠났다. 7개월 뒤 정계 복귀 목적으로 귀국하기에 앞서 두 사람은 요단강에 갔다. 천주교 신자인 DJ와 기독교를 믿는 이희호 여사가 성지를 방문한 것이다.

김대중-이희호 ‘47년 연가’

그 강에서 배를 타며 이 여사의 손을 주무르고 있는 DJ의 표정이 무겁다. 사진은 당시 DJ를 취재했던 월간중앙 신재형(현재는 남성지 MAXIM 발행인) 기자가 중앙SUNDAY에 보낸 것이다. 이 여사는 그 무렵 관절염을 앓고 있었다. DJ를 옥바라지 하느라 몸이 많이 상한 것이다. 다리 통증 뿐 아니라 손도 저릴 때가 많았다. 요단강을 여행하던 중 DJ는 손이 뻣뻣하다는 이 여사의 손을 주무르고 또 주물렀다. “아내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DJ의 마음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지 않나 싶다.

“요즘 우리 사이, 결혼 이래 최상”
“퇴임한 이후 7년이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인 것 같습니다.”
이 여사가 최근 한 지인에게 남편과의 사이를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힘든 길을 달려온 뒤 마음 편하게 남편과 보낸 시간이었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DJ도 21일 공개된 ‘마지막 일기’에서 맞장구를 쳤다.

“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매일 하느님께 기도한다.”(2009년 1월 11일)

2월 7일날 쓴 일기엔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단 두 문장으로 표현돼 있다.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두 사람은 62년 결혼했다. 이 여사의 외삼촌 집인 서울 체부동의 한옥에서 식을 치렀다. 첫 부인과 사별한 DJ는 당시 아들 둘이 딸린 정치적 낭인이었다. ‘잘 나가는 신여성’이었던 이 여사와 DJ의 결혼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47년 연가’를 함께 불렀다.

아내에 대한 DJ의 애정 표현은 저서 『김대중 옥중서신』(한울)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서신은 DJ가 사형수로서 5개월간 독방에 수감된 뒤 무기수로 감형된 81년 1월부터 82년 12월까지 쓴 것들이다. 편지에서 첫 문장의 대부분은 “존경하며 사랑하는 당신에게” “나의 경애하는 당신에게”로 시작한다.

“운동하러 뜰에 나가면 국화가 한창인데 전부 노란색의 것뿐입니다. 내가 돌봐 준 화단의 꽃들은 열심히 가꿔 준 보람이 있어서 피기도 훨씬 싱그러웠지만 견디는 것도 거의 한 달을 더 견디어 주어서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꽃을 손볼 때마다 집의 화단 가꾸던 일을 생각합니다. 당신이 꽃들의 소식을 전할 때마다 눈에 선합니다. 그리움도 사무칩니다.”(81년 10월 28일)

이 여사, 고난 겪으며 조용한 성격으로
아내에 대한 DJ의 마음은 단지 애정이나 사랑으로만 요약되진 않는다. 아내가 정치적 반려자이자 동지이기 때문이다.

유복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서울대 사범대, 미국 유학을 거친 엘리트였다. 결혼 전 YWCA 연합회 총무였고 글쓰기와 연설에도 능한 인재였다. 성격도 적극적이고 쾌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인 DJ와 결혼하며 그녀의 생은 완전히 바뀐다. 40여년 이상 고난의 연속이었다. 명랑했던 성격도 차분하고 조용해 졌다.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 이 여사가 풍상을 겪는 동안 성격이 변했나 싶어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옥중 서신 중 80년 12월에 쓴 편지에는 아내를 경애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당신의 생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욱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바르게 살기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유난히 강했습니다.”

실제 생활 속에서도 그랬다. DJ는 존댓말을 썼고 아내의 의사를 존중했다. 동교동 시절부터 자택 대문에 ‘김대중·이희호 ’공동 문패를 달았다.

한 측근이 전하는 얘기다. 96년 무렵 DJ 부부가 여행 중 호텔에 투숙했을 때였다. DJ는 당시 야당 총재였다. 이 여사가 침대 한편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마침 그 시간에 다른 채널에선 중요한 뉴스를 하고 있었다. 이럴 경우에도 DJ는 “여봐요, 채널 좀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라고 정중히 부탁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부부를 보좌한 이 측근은 “서로 존경하고 아끼는 일이 많았지만 그때의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97년 대선 당시 후보 부인을 담당했던 김희선 전 의원은 “서로 챙겨 주는 부부 사이도 각별했지만 DJ가 정치적 동지로서 이 여사의 의견을 존중했다는 인상이 오랫동안 남아 있다”며 “이 여사의 의견은 대부분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기독교인과 천주교인으로
서로 종교적 차이를 인정한 점도 독특하다. DJ는 57년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됐다. 이 여사는 기독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태 신앙이었다. DJ는 아내의 종교를 인정했다. 그래서 DJ는 일요일에 성당으로 향했고 이 여사는 혼자 교회로 갔다. 지난해 11월 열렸던 이 여사의 저서 『동행』 출판기념회에서 둘은 각각의 인사말을 통해 아내와 남편에 대해 얘기했다.

이 여사는 “우리의 동행은 하나의 회전무대 같았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저와 인생을 동행하면서 저를 아끼고 도와준 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DJ는 “고난을 이겨낸 힘이 된 것도 아내요, 내가 영광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도록 내조를 한 것도 아내였습니다”라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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