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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보내 노무현 유족에 국민장 하라고 설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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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공식 홈페이지에 21일 공개된 일기장左과 5월 1일 친필 일기.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생애의 마지막 나날을 기록한 일기가 21일 공개됐다. 유가족들은 DJ가 올 1월 1일부터 6월 4일까지 쓴 100일치 일기 중 30일치를 40쪽 분량의 소책자로 만들어 배포했다.

일기에는 이희호 여사와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겼다. 소소한 일상도 드러난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1월 11일)

“손자 종대에게 나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이웃사랑이 믿음과 인생살이의 핵심인 것을 강조했다.”(5월 30일)

1월 1일에 쓴 일기엔 10시간 동안 세배를 받은 뒤 피곤함을 호소하며 “새해에는 무엇보다 건강관리에 주력해야겠다. ‘찬미예수 건강백세’를 빌겠다”고 적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 역정도 반추했다. 생일인 1월 6일엔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며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고 썼다. 15일엔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 살아왔다”고 반추했다.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1월 14일)라는 구절도 있다.

현 정부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용산 참사에 대해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고 적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는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규정했다. 유족들이 노 전 대통령 장례에 대해 가족장을 원했던 것과 관련, “박지원 의원을 시켜서 ‘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살았고 국민은 그를 사랑해 대통령까지 시켰다. 그러니 국민이 바라는 대로 국민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했는데 측근들이 이 논리로 가족을 설득했다 한다”(5월 24일)고 적었다. 영결식에 참석한 29일엔 “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2월 4일 ‘DJ 비자금 의혹’에 대해 검찰이 “DJ는 관련 없다”고 발표하자 “너무도 긴 세월 동안 ‘용공’이니 ‘비자금 은닉’이니 한 것, 이번은 법적 심판 받을 것”이라고 적었다.

북한이 2차 핵실험(5월 25일)을 한 날도 일기를 썼다. 그는 “핵실험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면서도 “북의 기대와 달리 (오바마 정부가) 대북정책 발표를 질질 끌었다. 이러한 미숙함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 핵실험을 강행하게 한 것 같다”고 우려했다. 6월 2일자 일기엔 “71년 국회의원 선거 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여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대목을 남겼다.

그의 일기는 6월 4일로 끝난다. 눈의 초점이 안 맞아 글 쓰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5월 20일 일기에서 “걷기가 다시 힘들다” “집안에서조차 휠체어를 탈 때가 있다”며 병마의 고통을 토로했다. 이 즈음 그는 비서진에게 녹음기를 사오게 했을 정도로 기록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녹음기엔 “아, 아, 마이크 테스트”라는 말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최경환 비서관은 비공개된 부분에 대해 “너무 사적이거나 국민 통합의 계기가 돼야 할 국장 분위기를 해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일기 공개에 대해 한나라당은 국장 분위기를 감안해 맞대응은 자제했지만 안으론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국민 통합을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국장까지 하는 마당에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내용을 공개한 것을 수긍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억울하기로 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훨씬 더 했을 텐데 그분이 남긴 메시지는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내용뿐 아니었느냐”며 “굳이 정치적인 부분까지 공개한 결정은 김 전 대통령의 뜻과도 맞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강주안·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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