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독과점 폐해보다 기업회생 우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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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독과점 우려가 현저히 높아지는 기업결합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외자유치를 통한 부실기업 회생.산업경쟁력 향상의 효과를 들어 이례적인 조건부승인 조치를 잇따라 내리고 있다.

23일 공정위는 최근 미국의 질레트사가 주식취득을 통해 로케트전기의 '로케트' 상표권 및 판매자산을 인수한 데 대해 조건부승인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기업결합후 국내 건전지시장에서 질레트의 시장점유율이 34.3%에서 59.8%로 껑충 뛰어올라 독과점의 폐해가 심화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행 로케트전기 계열 3개사의 재무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라 이번 결합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지급불능상태에 빠지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라는 게 공정위의 설명이다.

단, 공정위는 질레트가 향후 독과점적인 지위를 악용해 가격을 크게 올릴 것에 대비해 2003년말까지 5년간 로케트 알카전지의 국내 소비자가격을 미국 소비자가격의 55% 이하로 억제해야 한다는 이례적인 단서를 붙였다.

공정위가 부실기업을 회생시킬 다른 방도가 없다는 이유로 독과점적 기업결합을 조건부 승인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조건부승인 조치 왜 나오나 = 현행 공정거래법은 상위 1개사의 시장점유율이 50% 이상이거나 상위 3개사의 점유율이 70% 이상 되는 기업결합은 원칙적으로 제한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최근 기업구조조정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기업결합 심사지침을 개정해 ▶부실기업을 회생시킬 다른 방안이 없는 경우▶외자유치를 통해 국내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는 경우 등에 한해 예외를 인정할 수 있게 했다.

독과점방지에만 급급하다 자칫 구조조정의 큰 그림을 망칠 수 있다는 지적때문. 이후 공정위는 시장점유율이 제한기준을 훨씬 웃도는 기업결합에 대해서도 전례 없이 조건부승인 조치를 속속 내리고 있다.

이번 질레트의 로케트전기 인수건에 앞서 지난달 25일에는 싱가포르에 소재한 한국 (한솔제지).캐나다 (아비티비).노르웨이 (노스케) 의 합작지주회사인 '델피니움 엔터프라이즈'가 한솔제지와 신호제지의 신문용지 사업부문을 인수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때는 한솔제지 (45.8%).신호제지 (10.4%) 의 국내 신문용지 시장점유율이 97년 기준으로 56.2%에 이르기 때문에 델피니움의 판매량을 2003년말까지 국내 전체판매량의 50%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또 지난 4월에는 프록터 앤드 갬블 (P&G) 의 쌍용제지 인수건에 대해 시장점유율이 현저히 높아지는 생리대 사업부문만을 매각하는 것을 단서로 조건부승인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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