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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아웃, 아름다운 헤어짐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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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당황스러운 이런 일이 닥치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냥, ‘네 잘 알겠습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하고,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직행할 자신이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엉덩이의 집착에 새삼 놀라면서, 남아야할 빼도 박도 못할 당위성을 찾느라 머리에 쥐가 날 것이다.

그도 그랬고, 모두가 그랬다. 그는 말한다. ‘직장에 들어오면 별을 달아야 했지만, 당시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아쉬움도 당연히 많았고, 정든 사람도 많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한다는 불안감도 많았습니다.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아주 강한 터라, 집사람 도움 없이도 가정을 꾸려가길 원했는데,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그래서 많이 생각했다.’

당연히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부 사람들은 인사팀을 찾아가 읍소까지 하며 ‘나는 왜 회사를 떠나서는 안 되는지’를 설득하기도 했다. 부모와 자녀까지 들먹여야 하는 현실에 설움이 복받쳤을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아리다. 그러나 어쩌랴? 누군가는 회사를 떠나야 하는 걸!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앞두고 경영진이 먼저 취한 조치는 급여삭감! 임원진부터 급여수준을 타사의 차/부장 수준으로 낮추고, 그 다음에 급여 50% 삭감조치를 단행했다. 그리고 퇴사 기준을 정해서 발표했는데, 그때 등장한 ‘퇴사 기준’은 이랬다.

입사 20년차 이상 고령자 우선 퇴사! 이유는 그나마 먹고살 만하기 때문에. 그래서 40대 후반의 고참들이 많이 나갔다고 한다. 사내에 배우자가 근무하는 경우 한 사람만 잔류! 그나마 한 사람이 버니까! 그 다음에, 나가도 대안이 있는 자생력이 있는 선수 ‘절대 환영! 집안형편이 극히 어려운 사람은 가능한 잔류!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이런 기준을 정했다 하더라도 이것을 흔쾌히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읍소형 항명이 있었을 뿐, 누구도 머리띠를 두르고 나서진 않았다! 워낙 상황이 압박적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조직문화가 그것을 억제했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무슨 얼어 죽을 기업문화?

놀라지 마시라!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들을 온순하게 만든 기업문화는 바로 ‘인화’였단다. 인화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여러 사람이 서로 화합함.’ ‘인화’를 말로만 하는 기업도 많은데, 쌍용건설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들 대부분은 오히려 남은 자들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회사를 떠났다.

당시 회사를 떠난 자로서 한 부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오히려 후배들에게 짐을 많이 지워주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잘 생존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요.’ 아마도 나가는 고참 중에는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추측이다.

남은 자들에도 상황은 결코 녹녹치 않았다. 급여 50% 삭감에 회사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이 택한 길은 퇴직금을 담보로 자사주를 매입하고 우리사주조합을 만든 것이었다. 떠난 자도 남은 자도 모두 여기에 동참한 결과, 그들은 20%의 지분을 갖는 대주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무조건 회사를 살려야 한다. 그래야 나도 산다. 그래서 나간 자들도 불러오자!

당시 사내 게시판에는 고단한 삶에 대한 사연들이 간간이 올라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는데, 이런 사연도 있었다고 한다. ‘퇴근길에 아이가 생일이라는 것이 떠올라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딸랑 1,200원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물로 풍선을, 케이크 대용으로 초코파이를 사들고 들어가 생일잔치를 해줬다.’ 이런 사연은 경기침체로 실직이 다반사인 요즈음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회사를 떠난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한 부장은 평상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중소 정수기 업체에 취업을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거기에서 그가 행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큰 기업에 다니다 중소업체로 옮기다 보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을 테지만, 새로운 기업문화에 적응하기에도 벅찼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퇴직한 사람 가운데 나이가 든 층은 식당 같은 자영업을 개업하거나 유관 업종에 종사하는 길을 택했고, 30대 중반에 나간 경우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유관 회사로 재취업하거나 타사 관리직으로 전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이 회사를 떠난 이후 다행히 호황국면이 도래했다. 해외건설 수주도 늘어났고. 그 결과 나간 자들에게도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상당수는 유관업종 타사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회사도 다시 직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떠나보낼 때 약속이기도 했지만, 경험 있는 인력이 다시 필요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직장에서 힘겹게 적응을 해가고 있던 한 부장에게도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왔다. 직장 1년 후배지만 동기처럼 지내던 그로부터. ‘너 거기서 뭐하고 있냐? 다시 돌아와라!’ 그 한통의 전화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만난 옹달샘과 같았다. 당근, 한달음에 회사를 찾았고, 당시 다니던 업체에는 미안했지만, 냉큼 짐을 싸고 다시 들어왔다. 다시 들어와서도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워도 함께 땀을 흘릴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다시 입사를 원하는 직원들에게는 거의 대부분 ‘리콜 프로그램’이 적용되었다. 구두약속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실천했던 것이다.

만약에 남은 자와 떠난 자들이 험악하게 헤어졌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 쉽진 않았을 것이다.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진 까닭에 도저히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쌍용건설의 사원들은 스스로 회사의 주인이 되었고, 회사의 주인답게 아름다운 이별을 택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행복하다.

지금도 쌍용건설 사원들은 주식을 잘 팔지 않는다고 한다. 퇴직을 한 사람들조차도. 아주 돈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모든 사원으로 이뤄진 우리사주조합의 애사심도 당연히 대단히 강하다. 한 부장에게 다시 물었다. ‘만약에 다시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쎄요. 마찬가지 결정을 하지 않을까요? 그때 고참들이 어려울 때일수록 새 피를 수혈해야 한다면서, 자기 월급이면 신입사원 몇 명은 더 뽑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기꺼이 회사를 떠났는데, 저도 그래야겠죠.’ ‘내가 나감으로써 회사가 잘될 수 있다면, 미련 없습니다. 내가 청춘을 바친 회사였고, 또 내가 주인인 회사 아닙니까?’ 다시 회사가 어려워지더라도 아마 대부분의 직원들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삼아, 회사를 살릴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이라고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란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에게 조금 민감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이 회사에는 라인 없습니까?’ ‘글쎄요. 우리끼리 가야하기 때문에, 회사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상호 감시하는 구조 같은 것이 작동합니다. 모든 사원이 주주다 보니 주식의 가치와 이익 배분 늘 고려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오로지 실적으로 승부한다는 의식이 강하고, 경영진이 그 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검증을 받고 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더 민감한 질문 하나를 던져보았다. ‘쌍용자동차 문제, 어떻게 보세요?’ ‘기업문화가 우리 회사하고는 다른 것 아닐까요?’ ‘서로가 고통을 분담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런 사태로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역시 ‘인화’가 좋다는 뜻일 게다. 기업문화란 것이 그토록 강력한 것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만남이었다.

이종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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