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의 FUN FUN LIFE] 부엌은 놀이터, 나는 ‘라파게티’ 요리사예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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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의 귀가가 늦는 날이면 저녁당번은 내 몫이었다. 엄마는 외출하실 때마다 아빠랑 오빠 저녁밥을 잘 차려드리라고 당부하곤 했다. 저녁상이라야 겨우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들을 그릇에 담고, 밥통에 있는 따뜻한 밥만 퍼놓는 정도였다. 별로 어렵잖은 일이었다.

그러다 메인 메뉴가 없는 저녁상은 뭔가 초라하단 생각이 들어 계란프라이를 하기 시작했다. 프라이가 지겨워질 무렵부터 계란말이·계란찜에 계란볶음밥으로 만만한 계란을 섭렵한 뒤, 김치볶음밥·양파볶음밥 등으로 서서히 영역을 넓혀나갔다. 다들 경험이 있겠지만 어릴 적에 소꿉놀이 하듯이 칼로 파를 썰어보고, 마늘도 다져보고, 쌀도 씻어보는 것은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었다. 처음 해보는 음식들이었지만 내가 먹어봐도 참 맛있었다. 요리도 유전이라던데, 아마 음식 잘하시는 엄마의 맛을 그대로 내려다 보니 저절로 잘하게 된 건 아닌지.

내게 아빠는 하루에 대화 한 번 하기조차 힘든 무서운 분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셔서 내가 차린 저녁을 드시고는 ‘잘 먹었다’고 한 말씀 하시면 나는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기뻤다. 게다가 엄마도 돌아오셔서 ‘우리 딸 착하다. 다 컸다’며 칭찬까지 해주시니…. 아마도 그 기쁨의 기억 때문에 요리가 좋아졌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부엌은 늘 엄마 차지였다. 내가 요리할 수 있는 기회는 엄마가 집에 안 계실 때뿐이었다. 그때를 틈타 집에 보이는 식품들로 나만의 요리를 해보기도 했다. 요리가 뭐 별거 있나. 그냥 먹고 싶은 거 만들면 되는 거지. 물론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가 엄마한테 된통 혼난 적도 많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퓨전 혹은 엽기 요리에 도전했다. 첫 도전은 역시 가장 만만한 ‘라면’이었다. 라면으로 스파게티를 흉내낸 일명 라파게티. 라면을 따로 삶고, 라면 수프를 넣은 국을 따로 끓이다 펄펄 끓을 때 토마토케첩을 3큰술 정도 넣고 적당히 조린 뒤 면에 부어먹으면 된다. 각종 토핑은 알아서~. 이상할 것 같지만 꽤 맛있다. 친구들 불러서 해주곤 했는데, 보통 라면인 줄 모른다. 내친김에 어린 시절 확립된 내 레시피를 공개하자면….

일명 ‘핫빵’. 식빵을 전자레인지에 20초 정도 돌리면 아주 뜨겁다. 그 빵 위에 부드러운 바닐라 아이스크림(투게더가 제일 맛있다)을 한 스푼 푹 떠놓고 반으로 접어 먹어 보라. 뜨거운 빵과 찬 아이스크림의 조화가 은근히 색다르다.

다음은 양파볶음밥. 양파를 잘 안 먹는 아이들을 위해 개발했다. 기름에 채썬 양파를 충분히 볶은 뒤 밥을 넣고 잘 섞는다. 여기에 풀어놓은 계란을 넣고 익을 때까지 볶는다. 케첩에 비벼먹으면 더 맛있다.

마지막으로 크림떡볶이다. 요즘엔 흔한 메뉴가 됐지만 어쨌든 내가 손님접대용으로 자신있게 내놓는 메뉴다. 먼저 떡(가래떡, 조랭이떡 등 원하는 것으로)을 삶아 채에 건진다사진①. 브로콜리·양송이·베이컨·소시지 등 각종 토핑을 준비한다②. 떡을 삶는 동안 올리브유에 다진 마늘을 넣고 볶다가③ 준비한 토핑을 넣는다④. 여기에 생크림을 적당히 넣고⑤ 센 불에서 크림이 끓으면⑥ 삶아놓은 떡을 넣고 약 5분간 저어주면서 조린다⑦. 베이컨이 짭짤하기 때문에 굳이 소금을 넣지 않아도 된다. 끝으로 후추만 약간 뿌리면 끝⑧. 팁으로 하나만 더 보태자면, 나는 과일통조림을 먹고 나면 국물을 따로 불에 약간 졸여 놓는다. 그리고 찬물에 티백 하나 넣고 이 시럽을 부으면 맛있는 아이스티가 된다. 크림떡볶이에 아이스티 한 잔이면, 정말 최고다.

정말 부엌처럼 재미있는 곳은 없다. 부엌에서 나오는 생활의 지혜는 무궁무진하다. 나는 냉장고 탈취제 대신 양파를 까고 남은 껍질을 망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둔다. 또 가끔 막걸리를 마시는데, 조금 남겨서 그릇에 담아 소나무 뚜껑을 덮어둔다. 그러면 식초가 되는데, 이걸로 싱크대를 닦으면 속이 후련하게 깨끗해진다.

그런데 해놓고 보니 음식들이 하나같이 ‘칼로리 왕국’이다. 사진 찍느라 이 음식을 새벽녘에 만들고, 아까워서 다 먹고 잤다는 거. 지난번엔 다이어트 얘기를 하고, 곧바로 고칼로리 요리법이라니. 그저 미안할 따름이고. 혹시라도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자! 우리 함께 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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