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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노무현 없는 진보 세력의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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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돌이켜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우리 현대사를 이끌어 온 양대 정치가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를 주도했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를 이끌어 왔다.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경쟁한 바 있는 김대중 대통령은 70년대는 물론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으며, 97년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삶은 한겨울을 견뎌 초여름에 꽃을 피우는, 많은 이에게 깊은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안겨준 인동초(忍冬草) 그 자체였다.

김대중 정부가 남긴 업적은 매우 뚜렷하다. 경제적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의 초석을 쌓았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실시 등 복지국가의 기틀을 세웠으며, 여성부·국가인권위원회 설치 등 사회민주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어떤 정부의 업적이든 시간이 지나면서 종합적 평가가 이뤄지기 마련인데, 김대중 정부는 자신이 내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에 충실함으로써 외환위기 이후의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부여했다.

더없이 안타까운 것은 올봄과 여름 우리 사회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을 연이어 잃게 됐다는 점이다. 특히 넓은 의미의 진보·개혁 세력이 갖는 비통함은 두 전직 대통령이 차지해 온 정치적 비중을 생각할 때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일각에선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대외개방과 대내복지를 생산적으로 결합하고자 했던 10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적한 ‘되찾은 10년’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 사회에 이중적 과제를 부여한다. 먼저 진보·개혁 세력은 ‘김대중-노무현 모델’의 공과를 차분히 돌아보고, 이에 기반한 새로운 진보·개혁적 국가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모델’은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가치의 정치’를 목표로 했으되, 외환위기 극복, 개방과 복지의 선순환이라는 ‘현실의 정치’를 중시했다. 역사에서 비약은 없다. 따라서 진보·개혁 세력은 변화하는 세계화 시대에 적극 대응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더불어 잘사는 균형발전 사회’를 새롭게 버전업(version-up)하고, 이를 정책대안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모델’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넘어설 것인가, 다시 말해 ‘발전적 계승’과 ‘홀로서기’라는 과제를 진보·개혁 세력은 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아가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는 사회학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제1의 모더니티’의 종막을 의미한다.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와 김대중 시대의 민주화가 역사화되는 지점을 우리 사회는 이제 지나고 있다. ‘제1의 모더니티’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산업화는 민주화를 요구하고, 질 높은 민주화는 다시 새로운 산업화를 요구한다. 민주화와 산업화가 배타적 가치가 아니라 상호보완적 목표였음은 지난 60여 년의 우리 모더니티의 역사가 생생히 증거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연이은 서거를 접하고 마음이 더욱 처연해지는 것은 리더십의 상실이 주는 비통함 때문만은 아니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짙은 안개 속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여전히 서성거리며 망설이고 있다. 새로운 산업화와 질 높은 민주화, 그리고 성숙한 사회통합을 성찰적으로 결합해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제2의 모더니티’의 실현은 우리 세대에게 부여된 엄중한 과제다. 부디 장례 기간만이라도 우리 사회가 선 자리를 겸허히 돌아보고 나아갈 길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보자. 삼가 김대중 대통령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