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가' 김대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의 정치가’.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백과사전에서 ‘김대중’이란 이름을 치면 이 여섯 자가 맨 먼저 등장한다. 84년(호적 기준)의 생애에서 반 세기 이상을 한국 정치의 한 복판에서 살아온 김대중의 삶은 그대로가 한국 현대정치사다. 그도 자서전『나의 삶 나의 길』(1997년) 머리말에서 “어쩌면 내 어줍지 않은 삶이 한국의 현대 정치사로 읽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었다. 그런 만큼 현대 한국 정치사에 등장하는 크고작은 정치인들은 정치인 김대중과 직접이든 간접이든 교직(交織) 하며 존재해왔다.

해방 후 어지러운 정치 공간을 비집고 등장한 군사정권에 저항해온 민주화세력의 중심축이 그였다. 1987년이 잉태한 3김정치 구도에서도 정치인 김대중은 상수다. 그가 뿌려놓은 크고작은 갈등과 희망들은 한국 정치의 현재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그의 서거에 대해 어느 정치학자는 “카리스마의 정치시대가 종언을 고했다”고 말했다.하지만 카리스마 정치가 뿌린 공과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가 참 시작일 수 있다.

◇운명의 정적(政敵),김대중과 박정희
1958년 5월. 4년 전 3대 민의원선거에 목포에서 출마해 낙선한 김대중은 와신상담, 4대 민의원 선거에 강원도 인제 출마를 결심했다. 그러나 후보 추천인들의 서명이 자유당 후보와 겹친다는 이유로 선관위로부터 등록 무효 결정을 받는다. 그의 출마를 막기위해 관청과 경찰 등이 '수작'을 부린 결과다.

분노한 김대중은 엉뚱한 생각을 한다. 선거부정 문제를 군대에 호소하겠다며 해당 지역 사단장 관사를 찾아간 것. 사단장은 부재중이었다. 그 사단장이 3년 뒤 5ㆍ16으로 정권을 잡게 되는 박정희였다. 김대중은 이 순간에 대해 “운명은 그렇게 얄궂다. 만약 그 때 거기서 그를 만났더라면 우리는 함께 부정선거에 대해 의논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면 최대 정적이 돼야했던 숙명도 조금은 양상이 바뀌었을지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 ‘얄궂은 운명’은 70년대 한국 정치의 양 극단에 그 둘을 세워놓았다.

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김대중은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인다. 관권선거와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속에서도 그는 94만7000표 차이로 진다. 그러나 이 선거는 단번에 그를 정권의 최대 위협자로 자리매김했다. 운명적인 정적이라지만 둘은 사실 단 한 차례 대면했을 뿐이다. 63년 당시 그는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한 다른 의원들과 함께 청와대 신년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박정희를 만났다. 그는 이 때를 “선 채로 인사를 했는데 박 대통령은 상냥하고 성실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 줬다”고 기억했다.

미움의 끝은 사랑일까.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박정희와의 화해를 김대중은 원했다. 자서전에서 “나는 그에게서 군인다운 순수를 높이 샀다. 그에게도 권모술수를 용납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지면서 정상 궤도에서 이탈해갔다. 이 때문에 그와 자주 만나지 못하고 살아 있을때 화해할 기회를 만나지 못한 점을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적었다.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 김대중과 3김정치
숙명의 라이벌-. 김대중과 김영삼이 그랬다.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에 맞서 둘은 한 편이었다. 그러나 나눠가질 수 없는 권력을 놓고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경쟁하고 질시했다. 정치판에서의 만남부터가 그랬다.민주당 구파를 선택한 김영삼과 신파를 선택한 김대중은 두 파가 합쳐 만든 신민당의 68년 원내총무 경선에서 처음으로 맞대결한다.승자는 김영삼.

하지만 이 승패는 2년 뒤 뒤집힌다.김영삼이 '40대기수론'을 들고 대통령 후보경선에 뛰어들자 같은 40대인 김대중과 이철승도 가세한다.1차투표 결과는 김영삼 1위,김대중 2위였다.그러나 2차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은 이철승의 지지를 끌어들여 역전승을 거둔다. 젊어서 아직은 기회가 남았다고 느껴서일까.이 때 둘은 한 배를 탄다.김영삼은 김대중의 선거를 돕는다.

그러나 박정희가 79년 10ㆍ26으로 사망하면서 대통령 자리를 노린 둘의 권력욕은 서서히 충돌한다.전두환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둘은 민추협 공동의장을 거쳐 신한민주당 창당까지 협력한다. 하지만 이 협력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이후,13대 대선이라는 공통의 목표에 직면하면서 평화민주당(김대중)과 통일민주당(김영삼)이라는 딴 살림을 차리고 다시는 돌아오지못할 다리를 건넌다.

양 김의 분열은 민주화 세력에 좌절감을 안겼다.김대중은 97년 “그 때 일을 후회한다.국민 염원을 최우선에 두고 내가 양보했어야 했다”고 때늦은 후회를 한다.

영남(거제)출신 김영삼과 호남(신안)출신 김대중의 대립은 영호남 지역대결이라는 주름을 더욱 선명하게 새기고 만다.‘인동초(忍冬草)’로 불렸던 김대중의 지사적(志士的) 가치가 권력을 좇는 정객(政客) 수준으로 흠집나기 시작하는 것도 이 때부터다. 여기에 1노3김의 대결로 불린 87년 대선부터 충청(부여)출신 김종필이 양김 대립구도에 가세하면서 한국 정치는 이들 셋이 엮는 어지러운 승부 조합에 휘말린다.지역구도를 기반으로 한 3김정치는 정치판의 블랙홀로 작동한다.

이후 김영삼이 김종필을 포함한 3당 합당으로 14대 대통령이 되고,김대중이 김영삼이 내친 김종필과 손잡고 15대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가슴보다 머리가 앞선 권력 투쟁의 결과였다.

◇에필로그,김대중을 보내며
정치인 김대중이 남긴 그늘은 넓고 짙다.2004년 언론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재임기간 중 가장 아쉬운 점이 뭐냐’는 질문에 “동서화합”이라고 대답했다. 삶의 절반 이상을 정치와 함께 숨쉬어온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정치인상은 뭘까.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백성을 하늘 같이 생각하면서 서생적 문제 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을 적절히 조화하는 정치인이 성공한다.” 그는 성공한 정치인일까? 정답 찾기는 역사의 몫이다.

박승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