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투쟁' 끝…'노조 = 약자' 등식 깨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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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의 올 하투(夏鬪)가 마침표를 찍는 분위기다. 강경투쟁에 나섰다가 여론에 밀려 철회하는가 하면 불황을 의식해 무분규 타결로 매듭짓는 사업장이 속속 나오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올해 노사분규 건수와 근로손실일수는 지난해보다 늘어나 어려운 경제에 더욱 부담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잇따른 파업 철회=대한항공 노사는 지난 7일 오전 임금협상을 잠정 타결하고, 파업안 철회에 합의했다. 합의안은 기장.부기장 모두 기본급 6% 인상에 비행수당은 기장 6%, 부기장 4% 인상하는 내용이다. 총액으론 5.4% 정도 오른 것이다.

이는 당초 노조가 요구한 ▶기본급과 비행수당 각 9.8% 인상▶상여금 50% 인상 등 총액 대비 11.3%의 임금 인상안에서 크게 물러선 것이다.

지난달 22일부터 파업 중이던 한보철강 노조도 지난 6일 사측과 임금 인상안에 합의하고 파업을 중단했다. 파업 개시 16일 만이다. 합의안은 ▶올해 임금을 총액 대비 9.5% 인상하고▶경영성과금 100% ▶매각위로금 300%를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당초 노조는 매각위로금 500% 지급과 고용보장, 매각 후 노조활동 보장 등을 요구했다.

민주노총 산하 최대 단일노조인 KT도 지난 6일 조합원 총회 찬반투표에서 찬성률 77%로 ▶임금 총액대비 2% 인상▶사내복지기금 500억원 출연 등을 내용으로 하는 단체교섭안 타결을 확정했다. 2년 연속 무분규 타결이다. 6일 업무 복귀를 선언했던 LG칼텍스정유 노조는 9일 오전 여수공장으로 한꺼번에 출근할 예정이다. 그러나 회사 측 방침과 달리 '단체 복귀' 입장을 고수, 정상 업무복귀에 약간의 진통이 따를 전망이다.

◇분규는 지난해보다 늘어=올 들어 지난 6일까지 노사분규 발생건수는 402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61건)에 비해 54% 증가했다. 노동부는 보건의료.금속.버스.택시노조 등 산별노조가 주도한 총파업이 많아 분규사업장이 늘었다고 풀이했다.

보건의료노조 파업은 13일 동안 끌었고 버스노조도 지역별로 파업에 들어갔다. 민주노총 산하 민주택시연맹은 비록 당일 철회하긴 했지만 하루 동안 파업을 벌였다. 금속노조도 100여개 산하 사업장이 참여한 가운데 두차례 총파업과 부분파업을 이끌었다.

분규로 인한 근로손실일수도 90만4938일로 지난해(84만여건)보다 7.6% 정도 늘었다. 분규건수에 비해 근로손실일수 증가율이 낮은 이유는 지난해 장기파업을 벌였던 현대차가 올해는 파업 5일 만에 노사교섭을 타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도 현대.기아차.LG칼텍스정유.코오롱.한미은행 등 대규모 사업장과 지하철노조 같은 공기업 노조가 파업을 주도,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컸다.

노동부 관계자는 "대기업 노조가 매년 관성적으로 파업을 주도하는 한 근로 손실과 하청업체 생산 차질 등의 피해를 줄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올해도 소수 대기업 노조가 파업을 주도하는 현상은 변함이 없었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취임 전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을 바꾸겠다"고 공언했으나 아직 달라진 게 없다.

◇여론 얻지 못한 파업=이번 하투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여론이었다. 특히 고임금을 받는 노조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별다른 성과 없이 파업을 철회해야 했다. '노조=약자'라는 등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여론의 지지를 못 받은 파업은 성공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예컨대 지하철 노조가 강경하게 나서지 못한 채 파업을 철회한 데는 노조 게시판을 뒤덮은 시민들의 비난여론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LG칼텍스정유 노조도 고임금으로 곱지 않은 눈길을 받는 상황에서 김선일씨 살해 장면을 패러디하다 여론의 집중타를 맞고 손을 들었다.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 역시 "억대 연봉자가 또 임금 인상이냐"는 사회적 비난을 의식, 파업 결의를 해놓고도 강행하지 못했다.

◇비정규직 문제 뒤로 밀려=이번 하투에서 대부분의 정규직 노조는 교섭 조건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앞세웠다. 하지만 교섭이 본격화하면서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내걸어 내심 기대했으나 막상 결과를 보면 정규직과의 격차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대차의 경우 비정규직 임금 인상률을 정규직 임금 인상분의 80%로 정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총액 격차는 더 벌어졌다.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비정규직 문제를 내세웠지만 개별노조에선 임금 인상.인력 충원 등 현실적인 문제를 더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상급단체와 개별노조 간에 호흡이 맞지 않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올해 처음 산별교섭을 벌인 보건의료노조는 서울대병원이 산별 합의에도 불구하고 파업을 계속해 갈등을 빚었다.

이번 하투의 여파로 당초 6일로 예정된 노사정 대표자회의가 무기한 연기되는 등 노사정 대화도 당분간 지지부진할 전망이다. 민주노총 일각에선 내년으로 대화를 미루자는 강경론도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노사관계 선진화방안.공무원노조법 등 산적한 노사 관련 제도의 처리도 예정보다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

정철근.최지영 기자, 광주=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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