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때 오늘

“독일군과 관계했으니 배신자” 프랑스의 성차별적 여성 삭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1면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경구로 유명한 종군사진작가 로버트 카파(1913~1954)는 1944년 8월 18일 프랑스 샤르트르에서 머리를 깎인 채 모욕당하던 여성들을 카메라에 담았다(사진). 1944년 6월 6일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프랑스 각 지방은 여러 달에 걸쳐 점차 독일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레지스탕스 대원들, 해방 전투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독일에 부역한 여성들을 체포해 강제로 머리를 깎았다. 때로는 옷을 찢거나 구타하고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드골 임시정부의 사법기구에 의해 합법적 재판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삭발식은 때로는 부역자 자신의 집에서 비공개적으로, 때로는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리에 이루어졌다. 약 2만 명이 삭발당했다. 모니카 벨루치 주연 영화 ‘말레나’ 등을 통해 우리가 아는 여성 삭발식은 대개 독일군과 성관계를 가진 여성이 그 대상이다. 실제로 그런 여성이 절반을 넘었다. 하지만 그 밖에 독일에 경제·정치·군사적 협력을 했거나 밀고 행위를 한 여성도 그 대상이 되었다. 삭발식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몇 달간 주로 해방 직후의 ‘축제’ 분위기 속에 벌어졌다. 축제는 축제이되 다분히 폭력적인 축제였다. 뒤늦게 드골 정부가 제지했지만 대개는 삭발식이 이미 끝나고 난 뒤였다.

부역 여성 삭발식은 정당화하기 어려운 폭력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차별적인 폭력이었다. 삭발식의 이유 가운데 절반 이상이 독일 남성과의 성관계였지만, 반대로 프랑스 남성이 독일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삭발당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과연 사사로운 애정관계를 ‘부역’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지도 문젯거리다. 여성에게는 독일군과 관계를 맺는 것이 곧 ‘조국을 배반’하는 의미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여성에게는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여성이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한 것은 1945년 4월 29일이었다. 한국이 여성 투표권을 도입한 것이 유엔의 결의로 치른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였으니, 프랑스 대혁명의 발생지이자 시몬 보부아르로 대표되는 페미니즘의 모국 프랑스의 여성 투표권 도입은 뜻밖에도(!) 매우 늦은 편이었다. 그러므로 삭발식은 당시 팽배했던 남성 우위 문화가 과거사 청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