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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적 가치,경제위기 맞물려 학계 뜨거운 공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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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지난해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가 아시아 전반에 확산된 가운데 '아시아적 가치' 에 대한 논의가 더 뜨거워지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대표 이정호)가 11월 21일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근대성의 문제' 를 다룬 것을 시작으로 철학연구회 (회장 이삼열)가 '아시아적 가치는 있는가' 라는 주제로 11월 28일 추계학술대회를 여는 등 철학계에서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소장 임현진)가 11월20일 '동아시아의 근대화와 유교' 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연데이어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소장 정윤형) 도 '동아시아 발전모델에 대한 재평가와 전망' 이라는 주제로 오는 12일 오전 9시30분부터 서강대 다산관 지하 102호실 (02 - 739 - 2091)에서 여는 등 사회과학계로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논쟁의 시작은 지난해말 연세대 함재봉 (정치학).유석춘 (사회학) 교수 등이 학술계간지 '전통과 현대' 를 통해 경제위기가 투기적 금융자본의 교란에 의한 것일 뿐 아시아적 발전모델은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위기에 처한 세계경제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정경유착' 이 아시아 경제위기의 주범이라는 인식이 일반화한 상황에서 이같은 주장은 의외로 받아들여졌고 이런 이유로 최근까지도 '아시아적 가치' 에 대한 비판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철학연구회에서 발표한 정인재교수 (서강대.철학)가 "지역적.역사적.문화적으로 다른 나라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고 지적한 것이나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에서 발표한 김석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서구의 동양에 대한 관심과 자의적 해석마저 수입한 식민지적 사고" 라는 비판도 이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것.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시아적 가치' 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 함교수는 시장을 절대화한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국가의 유효성과 함께 노동윤리, 교육열,가족주의 등 '따뜻한 인륜' 으로 대변되는 유교적 가치의 대안가능성을 옹호했다.

나아가 "서구에서 시작됐다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식민지적 사고" 라고 주장했다.

반면 많은 학자들은 세계보편가치를 외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된 '아시아적 가치' 는 조작된 담론에 불과하며 개발독재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런 이유로 황경식교수 (서울대.철학과) 는 '아시아적 가치' 란 한국사회의 '후발성' 을 가리키는 징표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이같은 치열한 공방에도 이 논쟁은 실체적 쟁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낙년교수 (동국대.경제학) 는 "같은 시장이라 하더라도 문화적 전통에 따라 시장작동 메카니즘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고 전제하고 "가치판단을 떠나 아시아적 가치가 시장에서 이뤄지는 의사소통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쟁은 겉돌 수 밖에 없을 것" 이라 평가한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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