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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이제 재미있어, 내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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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호 20면

박세리 선수가 2007년 제이미 파 오웬스 코닝 클래식에서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왼쪽 사진은 유성의 자택에 전시된 US오픈 우승트로피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중앙포토]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11년이 흘렀네요. 아직도 데뷔 첫해의 기억이 생생한데 말이에요.” 박세리(32) 선수는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국 여자프로골퍼 가운데 처음으로 LPGA투어 무대를 개척했던 선구자다. LPGA투어 브리티시 오픈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한국에 돌아온 그와 지난 14일 인터뷰를 했다. 박세리 선수는 인터뷰 도중 옛 이야기를 하다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인터뷰는 박 선수의 대전 유성 자택에서 약 네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한국 ‘LPGA 정복사’의 선구자, 박세리

“LPGA투어는 아시다시피 세계 최고의 여자골퍼들이 모두 모여 샷 대결을 펼치는 무대잖아요. 1998년 데뷔 당시 저는 ‘3년 안에 우승’을 목표로 삼았어요. 그런데 데뷔 첫 해에 4승을 거뒀으니 생각보다는 빨리 목표를 이뤘던 셈이지요.” 박세리 선수는 98년 데뷔 당시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엔 1월부터 시즌이 시작됐는데 약 3개월 동안 순위가 20위권을 오르내렸지요. 신인이 그 정도면 잘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위의 기대가 너무 컸어요. ‘당장 짐 싸갖고 돌아오라’는 소리까지 들었을 땐 정말 서러웠지요. 펑펑 운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당시 상황을 회고하던 박세리 선수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는 그해 5월 메이저 대회인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에서 첫 우승을 거둔다. 그리고는 또 다른 메이저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마저 정상에 오르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첫해에 4승을 거두고 났더니 한국에서 ‘빨리 들어오라’고 난리가 났어요. 결국 마지막 대회를 마치자마자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부랴부랴 공항으로 달려갔지요. 그래도 일정보다 2시간이나 늦어서 비행기 타는 걸 포기했는데요. 막상 공항에 가보니깐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비행기가 저 하나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결국 그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왔어요.”

그 이후 박세리 선수는 LPGA투어에서 승승장구했다. 2001년과 2002년엔 각각 5승씩을 거두면서 안니카 소렌스탐, 카리 웹과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2007년엔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LPGA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하면서 최고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이렇게 훌륭한 성적을 거뒀는데도 아쉬움이 있을까.

“저는 아직도 저의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제 나이가 적지는 않지만 꼭 전성기를 맞은 뒤 은퇴하고 싶어요. 언제 은퇴할지는 모르겠어요. 앞으로 10년을 더할지 20년을 더할지 저도 몰라요. 분명한 것은 얼마 전부터 골프가 재밌어졌다는 거예요. 이제는 진정으로 골프를 즐긴다고 자부해요.”

박세리 선수는 LPGA투어에서 메이저 대회 5승을 포함해 통산 24승을 거뒀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상금랭킹 1위를 차지한 적은 없다. 물론 세계랭킹 1위에 오른 적도 없다.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한 번도 상금왕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해서 아쉽다는 뜻으로 들렸다.

최근 LPGA투어를 휩쓸고 있는 ‘박세리 키즈’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요즘 나오는 20대 초반의 한국 선수들 제가 봐도 정말 대단해요. 저도 그 나이 때 그랬을까, 도무지 겁이 없는 것 같아요. 어찌됐든 한국 선수들이 LPGA투어를 휩쓸고 있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요. 이제는 세계 어느 곳을 가든 한국 선수들이 잘한다는 걸 인정해요. 달라진 위상을 피부로 실감한다니까요. 그런데 실력이 좋아질수록 책임도 커진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외국 선수들은 아예 드러내놓고 한국 선수들을 견제하기 시작했어요.”

박세리 선수는 최근 말레이시아 유명 리조트 골프장의 코스 디자인을 맡기로 계약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다고 털어놓았다.

“말레이시아 리조트의 대표가 그러더군요. ‘박세리라는 골퍼를 갖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부럽다’고요. 제 개인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한국 사람에 대한 존경심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울러 ‘아시아를 대표하려면 좀 더 잘해야 겠다’는 책임감도 느꼈어요.”

그는 또 한국에서도 골프 코스 설계를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소렌스탐이 처음으로 설계한 골프 코스가 한국에 들어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근데 그거 아세요. 저 역시 난생 처음으로 설계하는 골프장은 한국의 코스이기를 바랐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제의를 하지 않아 결국 말레이시아 골프장을 선택한 거지요. 그래서 좀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골프코스 설계 이야기 끝에 박세리 선수는 한국산 골프클럽 예찬론도 폈다.
“요즘 드라이버는 물론 아이언까지 국산 클럽을 쓰고 있는데 이게 정말 잘 맞아요. 제가 이제까지 안 써본 클럽이 없잖아요. 근데 이 국산 클럽은 외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요. 하기야 우리나라가 TV건 휴대전화건, 에어컨이건 모두 다 세계에서 제일 잘 만드는데 골프 클럽이라고 못 만들 이유가 없지요. 무턱대고 외국 클럽만 좋다고 여기는 풍토는 이제 사라질 때도 됐다고 봐요.”

박세리 선수는 올해 서른두 살이다. LPGA투어에서 12번째 시즌을 보내면서 결혼 적령기를 넘긴 셈이다. 언제쯤 결혼할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결혼이야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지요. 그렇지만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아요. 1년 내내 세계를 돌아다녀야 하는 이런 직업을 이해해주고 배려해줄 만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요즘엔 마음을 비웠다고 할까요. 열심히 운동하다보면 좋은 인연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요즘엔 가정보단 목표 달성이 우선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LPGA투어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한 박세리 선수의 다음 목표는 뭘까.
“제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이에요. (3개 메이저 대회는 우승했고) 나비스코 챔피언십만 남았는데 이게 잘 안 되네요. 올해 대회 때도 미션힐스 골프장 18번 홀 옆의 연못을 지나가면서 ‘내가 꼭 빠지고 말 테다’하고 별렀는데 올해도 꿈은 이뤄지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곧 제 목표가 이뤄질 거라고 믿어요.”
박세리 선수는 또 최근 경제 불황으로 LPGA투어도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미래를 낙관한다고 말했다.

“LPGA투어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선수들의 기량도 뛰어나고, 사무국도 조직적으로 움직이지요. 대회 수가 조금 줄어들었지만 곧 나아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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