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서 박물관서 밤文化가 깨어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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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호 12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오후 8~10시에 열리는 ‘라이트 월(Light Wall)’전. 건물 외벽을 캔버스 삼아 10분 길이의 작품 두 편을 번갈아 투영한다. 9월 19일까지 무료로 계속된다. 최정동 기자

“오늘이 세 번째 관람이에요. 야간 개장이 있다는 걸 알고는 일부러 저녁에 와요.”
12일 저녁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집트 문명전’을 보러 온 정숙영(43·논술지도사)씨는 이렇게 말하며 주변 학생들을 챙겼다. 초등학생 18명을 인솔한 정씨는 “지금은 사람이 적어 아이들이 관람하기 편하다”고 말했다. 시계는 벌써 오후 7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정씨 일행을 비롯한 관람객들은 크게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이 유료기획전은 평일에도 오후 9시까지 문을 열기 때문이다. 시대별 우리 유물을 무료로 볼 수 있는 상설전시실도 수요일인 이날은 오후 9시까지 문을 열었다. 대학원생 최종민(28)씨는 “외국에서 온 친구에게 한국 문화를 보여주려고 왔다”며 “낮에 시간이 없었던 데다, 저녁에는 꼬마들이 적어 조용한 것이 좋다”고 말했다.

“퇴근 후에 오세요” 야간 개장의 유혹

비슷한 시각,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은 한결 북적였다. ‘르누아르’전 등이 열리고 있는 이곳은 한 시간 더 늦은 오후 10시에 문을 닫는다. 전시된 그림 앞마다 정체를 빚던 관람 행렬은 오후 9시가 넘어서야 눈에 띄게 줄었다. 가까운 덕수궁미술관도 덕수궁이 문을 닫는 오후 9시에 맞춰 오후 8시30분까지 문을 연다. 이곳에서도 8시가 좀 넘은 시각에 가족·연인 혹은 홀로 호젓하게 관람을 즐기는 이들이 보였다.

미술관·박물관 등 국·공립 문화시설이 이처럼 밤에도 문을 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놀이공원·영화관 등 민간상업시설은 진작부터 야간 개장을 해왔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2006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지금같이 주 2회(수·토) 야간 개장을 시작했다. 현재는 경주·부여 등 전국 11곳의 지역 국립박물관도 주 1회 토요일에 오후 9시까지 문을 연다. 각 지역 시립미술관도 예외가 아니다. 광주시립미술관은 매주 수요일, 대전시립미술관은 매주 금요일에 각각 오후 9시까지 연장 개관한다.

야간 개장이 정착되면서 밤에 전시장을 찾는 손님도 부쩍 늘어가는 추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야간 관람객은 2007년 2만6000여 명, 2008년 3만2000여 명이던 것이 올해는 7월 말 현재 이미 2만6000명을 넘어섰다. 문화부에 따르면 11개 지역까지 합쳐 8만2000여 명이 전국의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이런 수요를 겨냥해 아예 자정까지 문을 여는 곳도 등장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올여름 8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토요일 관람시간을 자정으로 연장했다. 이 미술관 관계자는 “붐비는 관람객을 분산하는 차원에서 시험적으로 토요일 심야 전시를 도입했는데, 반응이 좋아 평일 관람 시간도 오후 9시에서 10시로 한 시간 연장하게 됐다”고 말했다. 휴가 절정기의 토요일인 지난 8일의 경우 오후 8시 이후 이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이 약 2600명이나 됐다. 이날 하루 전체 관객의 20%쯤 되는 수치다.

야간 개장이 이처럼 호응을 받는 것은 늘어난 문화 수요와 바쁜 생활 패턴이 고루 작용한 결과다. 12일 밤 가족과 함께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은 김정식(42)씨는 “큰아이 학원이 3~4시쯤 끝난다”며 “시간에 쫓기지 않고 관람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도심 문화시설의 평일 야간 개장은 직장인에게도 요긴하다. 12일 밤 덕수궁미술관을 함께 찾은 20대 직장인 두 사람은 “전에는 보고 싶은 전시가 있으면 회사를 빨리 마치고 나와 30분쯤 둘러보는 게 전부였다”면서 “요즘은 야간에 좋은 전시가 많아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야간 관람객을 위한 서비스도 늘고 있다. 낮 시간만 아니라 저녁에도 전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적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매주 수요일 오후 6시30분·7시30분에 여는 ‘큐레이터와의 대화’가 이런 예다. 이 박물관은 도심 직장인을 겨냥, 수요일마다 광화문에서 출발하는 무료 셔틀버스도 운행 중이다. 이 버스를 이용하면 유료기획전의 관람료를 할인해 준다. 서울시립미술관도 야간 관람료 할인을 실시 중이다. 야간 관람객을 겨냥해 별도의 문화행사를 여는 곳도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매주 수요일 밤 무료 영화상영회, 매달 한 차례 무료 음악회 등을 열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장 역시 평일 오후 9시까지 문을 연다. 현재 광화문 일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광화문 연가(年歌)-시계를 되돌리다’전이 한창이다. 두 아들과 함께 12일 저녁 박물관을 찾은 심재민(41)씨는 “빗길에 차가 막혀 야간 개장이 아니면 아예 구경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1일부터 새로 전시된 도시모형도 인기가 높다. 서울 전체를 1500분의 1로 축소해 놓았다. 초등학생 피현준(10)군은 이모할머니 강미령(64)·강애령(61)씨와 함께 이를 보러 12일 저녁 박물관을 찾았다. 강씨 일행은 “현준이가 꼭 봐야 한다고 졸라서 왔는데 예전에 살던 곳, 지금 사는 곳을 찾아보면서 서울의 변화를 한눈에 느끼는 감회가 크다”고 말했다. 다만 이 도시모형은 오후 6시 이후에는 점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도시모형 안에 건물이 70만 동, 이 중 조명이 연결된 것이 20만 동이 되는 큰 규모인 데다, (관람객이 던진 물건으로) 벌써 아파트 3동이 훼손되는 등 계속 보완이 필요하다”면서 “오후 6시 이후 관람을 막고 있지는 않지만 전시 상태가 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감안해 달라”고 말했다.

토요일인 8월 22일 하루 동안은 서울 5개 지역의 크고 작은 문화시설들이 한꺼번에 밤늦도록 문을 여는 행사도 열린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로 2회째인 ‘서울 문화의 밤’이다. 정동·대학로·북촌·홍대·인사동 등 5개 지역별로 화랑·공방·박물관·공연장 등 약 200곳이 참여한다. 이날은 덕수궁이 오후 11시까지 문을 여는 등 기존 야간 개장 시설도 관람시간이 연장된다. 각종 전시장의 야간 개방에 더해 지역마다 특성을 살린 문화행사·건축투어 등도 열린다. 소극장 공연 등 인원이 제한된 행사는 상당수가 이미 참여 신청이 마감될 만큼 인기다. 하지만 자유로이 참여할 수 있는 무료행사가 폭넓게 열려 있다. 또 유료행사를 1만원에 패키지로 즐길 수 있는 지역별 문화패스도 북촌·홍대 지역의 경우 여유분이 남아 있다. 지난해의 행사가 심야시간대 위주로 열렸던 반면, 올해는 한낮부터 시작해 대부분 자정 이전에 마무리된다. 행사 관계자는 “낮 시간에도 행사를 여는 것은 가족 단위 관람객들의 참여를 넓히려는 취지”라면서 “행사가 너무 늦게 끝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렵다는 점도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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