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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학이다] 3. 상상적인 글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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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문학평론가 백지연씨, 소설가 하성란·김경옥·조경란씨. 천운영씨는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다. 네 작가는 새로운 상상력을 표현하는 서술방식의 탐색으로 주목받았다. [최승식 기자]

다양한 예술적 체험들이 편리한 복제물의 형태로 순식간에 전달되는 시대에 문학은 어떤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영화 속의 연인들이 나누는 달콤한 사랑의 대화는 우리의 일상 구석구석에 스며 있고, 실제상황을 강조하는 방송의 리얼리티쇼는 현실보다 더 짜릿한 흥분을 제공한다. 순식간에 스쳐가는 감각적 이미지들 속에서 문자적 상상력의 여운을 즐기기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표현하는 서술적 방식의 탐색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러한 고민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김경욱과 하성란, 조경란과 천운영의 작품이 주목되는 이유는 감각적 이미지가 범람하는 현대적 일상성의 세계를 포착하는 방식의 새로움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 속의 고립된 개인에 대한 관심, 일상과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은 이들의 소설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들의 소설은 평범하고 단조롭게 보이는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우연과 비극이 숨겨져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감지하는 개인의 내면에 어떤 욕망이 출렁이는지를 들여다본다. 건조하고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보여주는 김경욱과 하성란의 작품은 소설적 플롯의 흥미로움을 활용하는 형식을 꾸준히 시도한다. 이와 비교한다면 조경란과 천운영의 소설은 심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체적 상징을 통해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김경욱의 최근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플롯의 형식적 실험을 주목해 보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한 『황금사과』는 가상역사소설의 한 형식을 통해 과연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탐색하고 있다. 최근 소설집인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에 담긴 단편작품들 역시 다양한 소재의 활용을 통해 ‘이야기’의 새로움을 추구한다. 초기작에서 영화적 상상력과 접목된 세대적 감수성을 신선한 형태로 선보였던 작가는 이 작품집에서 드라이한 관찰 기법으로 일상을 포착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누가 커트 코베인을 …』의 단편들에서 보이는 살해와 시체 유기, 자살과 불륜 등 극적인 모티프들은 그것을 기록하는 건조한 시선을 통해 일상의 무의미한 조각들로 분해되어 버린다. 소설 속에 포착되는 일상의 황량한 풍경은 단절될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침울한 풍경 밑에 깔려 있는 추억과 연민의 정서일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와 헤밍웨이의 소설, 기형도의 시와 김승옥의 소설에 심취해 있는 주인공들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도플갱어(또다른 자아)들을 발견한다. 우울과 몽상에 잠겨 있는 예술가에 대한 스케치는 김경욱 소설이 황량한 일상 속에 꼭꼭 숨겨놓은 낭만의 한 표지이기도 한다.

김경욱의 소설이 포착하는 건조하고 황량한 도시 일상은 하성란의 소설에서 세밀한 열거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익히 알려진 바 있는 하성란식 ‘마이크로 묘사’(김윤식)는 작가지망생들에게 문체적 유행으로 번지기도 했다. 속도감 있는 문체와 세부적인 관찰방식은 도시 일상 속에서 생기를 잃고 가라앉아 있는 정물과 인간의 풍경을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를 비롯한 하성란의 최근 작품들은 이 세련된 묘사기법을 소재적 다양함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한 예로 표제작인 ‘푸른 수염…’은 아내 살해사건의 모티프를 변용시키면서 독자가 예상하는 스토리의 결말을 뒤집는다. 이 작품이 끌어온 동화적 소재의 비극적 결말은 ‘오동나무장롱’이라는 소재를 거쳐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변화된다. 다양한 소재 속에서 독특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기법은 ‘별모양의 얼룩’에서도 솜씨있게 발휘된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능란하게 오가는 작가의 서술 방식은 씨랜드 화재사건의 고통을 섬세하게 재현하고 있다. 딸아이의 생존을 믿는 부모의 마음이 환상의 형식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일상이 숨기고 있는 비극적 국면을 새삼 환기시킨다. ‘강의 백일몽’ 등의 근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익명의 사람들이 빚어내는 우연과 비극을 극적인 이야기 구조로 담아내는 데 있어 하성란의 소설이 발휘하는 장기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숱한 우연과 비극과 충격과 파국에 눈감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하성란의 소설은 안온한 듯 보이는 일상이 얼마나 깊은 심연을 지니고 있는가를 의미심장하게 알려준다.

김경욱과 하성란의 소설이 보여주는 스피디한 서술 방식과 견준다면 조경란과 천운영이 보여주는 문체적 심미성은 상대적으로 소설의 고전적 미학을 환기시킨다. 특히 조경란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언어의 세공술은 독자의 미학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조경란은 치밀한 시각적 묘사 속에 인물들의 내면적 욕망의 이동을 꼼꼼히 기록하는 장기를 보여주는 작가이다. 최근 그의 소설은 일상에 잠겨 있는 결핍과 욕망에 대한 탐색이 글쓰는 자아에 대한 내밀한 탐색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코끼리를 찾아서』에서 보여주는 변화의 징후는 운명적인 동질성을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전환시키는 힘을 보여준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글을 쓰는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운명적인 사건과 징후들을 예민하게 건져올린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고독과 슬픔, 이별과 만남을 어떠한 방식으로 감당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헤어진 연인이 선물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한밤중에 사진을 찍는 주인공의 모습은 고독한 여운을 남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찰이 내밀한 자기 욕망의 탐색으로 향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예민하고 결벽한 예술가의 자기관찰이 이끌어내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세 작가가 나름대로 자신의 개성을 숙성시키고 심화시키는 과정에 있다면 천운영은 자신의 소설적 개성이 무엇인지를 의욕있게 드러내야 할 지점에 서 있는 신예작가다. 천운영의 첫 창작집인 『바늘』은 특유의 강렬하고 야생적인 육체의 이미지들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바 있다. 『바늘』에서 만날 수 있는 원시적이고도 싱싱한 감각들은 문명적 현대와 대비되는 새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준다. 문신술사와 가축도살업자, 고물상과 횟집 주방장 등 특정한 직업세계의 인물들이 등장한 작품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금지된 욕망의 세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추하고 그로테스크한 형상에 대한 의도적인 과장과 왜곡은 새로운 형태의 미학적 장치들을 보여준다. 천운영 소설에서 자주 눈에 띄는 ‘육식을 선호하는 야생적 여성’의 이미지는 기존의 소설들에서 드러난 여성의 이미지들과 확실히 차별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장편 연재로 소개된 ‘잘 가라, 서커스’는 방법적인 기교의 새로움에서 한 걸음 나아가 다양한 일상의 소재를 활용하면서 소설의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김경욱과 하성란, 조경란과 천운영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상상력의 세계는 권태롭게 보이는 일상 속에 어떤 운명과 파국이 숨겨져 있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한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를 지닌다. 새로운 상상력에 대한 이들의 고민은 결국 ‘글쓰기란 무엇인가’‘소설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되돌아온다. 김경욱과 조경란의 소설이 글쓰기의 자의식에 대한 성찰을 심화시킨다는 점, 하성란과 천운영의 소설이 서술기법의 변화를 시도하는 점은 그러한 측면에서 고무적으로 느껴진다. 문자예술의 상상력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일상의 그 신비로운 모습들을 담아내는 이들의 노력 속에서 우리는 미래 소설의 새로운 표정을 읽고 있는 것이다.

백지선(문학평론가)
사진=최승식 기자<choissie@joongang.co.kr>


▶ 왼쪽부터 하성란, 김경옥, 조경란, 천운영씨.

*** 하성란은

1967년 서울 출생. 92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96년 서울신문으로 등단. 소설집 『루빈의 술잔』『옆집 여자』『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 장편소설 『식사의 즐거움』 등을 펴냈다. 99년 동인문학상, 2000년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이수문학상을 받았다.

*** 김경욱은

1971년 전남 광주 출생. 96년 서울대 영문과 졸업. 9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베티를 만나러 가다』『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편소설 『모리슨 호텔』『황금 사과』 등을 펴냈다.

*** 조경란은

1969년 서울 출생. 96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96년 동아일보로 등단.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나의 자줏빛 소파』『코끼리를 찾아서』,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등을 펴냈다. 9*년 제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2003(?)년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 천운영은

1971년 서울 출생. 한양대 신문방송학과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0년 동아일보로 등단. 소설집 『바늘』을 펴냈고 2001년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2003년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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