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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이명박 대통령이 역사적 평가를 받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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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TV의 8시, 9시 뉴스도 반드시 시청하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수석비서관과 장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확인한다. 그러니 정책 관계자들은 늘 긴장할 수밖에 없다. 업무 일정 사이에 남는 짧은 자투리 시간에도 연설문이나 보고서를 검토한다. 뚜렷한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재임기간 5년이 짧다는 생각에서 1분도 아껴 쓴다. 밤늦게까지 인터넷 검색을 하느라 가끔 오후에 ‘출근’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교가 된다.

이 대통령이 업적에 대해 갖는 심적 부담은 요즘 더 커졌다.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하고, 투병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두 전직 대통령과 달리 이 대통령은 절대적 지지층이 거의 없다. 30대에 현대건설의 최고경영자(CEO)가 됐고, 서울시장 재직 시 청계천을 복원시킨 실적으로 중도 성향의 부동층을 사로잡아 대선에서 승리했을 뿐이다. 그래서 재임기간 동안 실적을 못 내면 허무하게 잊혀질 수도 있다. 이 대통령에게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시나리오다.

이 대통령은 대선 때 자신을 선택했던 중도 성향의 국민이 집권 이후 지지를 철회한 사실을 뼈아프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을 기치로 내걸었다. 보수의 정체성을 이탈했다는 비판까지 들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는 원래 민노당의 정책이었지만 눈 질끈 감고 추진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필요한 지지율 40%선까지 돌파했다. 새 노선은 일단 성공했다.

중산층을 복원하기 위해 ‘복지 뉴딜’을 하고, 아주 어려운 사람에게는 현금을 지급하겠다는데 누군들 싫어하겠는가. 문제는 이렇게 먹고사는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고 나면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뭔가 근본적인 가치를 요구할 수 있다. 원래 대중은 변덕스러운 법이다. 이 대통령이 직면한 어려움이다.

이 대통령이 퇴임 후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선 지지율 관리의 차원을 초월한 ‘역사와의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래야 해법이 나온다. 최우선적으로 남북 화해와 지역주의 청산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각각 토대를 세웠지만 지금은 많이 후퇴했다.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제는 대립과 분열을 화해와 상생의 구도로 바꿔 놓을 때가 됐다. 사실 이런 게 진정한 중도실용 노선의 핵심이 아닌가.

다행히 이 대통령은 최적의 현실적 조건을 갖췄다. 그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실용주의자다. ‘호남이 선택한 영남 대통령’이었던 노 전 대통령보다 ‘영남이 지지한 영남 대통령’인 이 대통령이 호남을 끌어안는 것이 훨씬 드라마틱하고 강력하다. 사실 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회장 때도 호남 출신을 다수 사장으로 기용했고, 이 지역에 줄곧 호감을 가져 왔다. 다만 대통령의 출신 지역인 TK에 코드를 맞추려는 정부조직 내부의 권력 생리가 문제인데, 이는 각별한 관리가 필요하다. 대북 화해정책의 추진도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는 기업인 출신 이 대통령이 훨씬 화끈하게 해낼 수 있고, 정치적 부담도 적다.

당장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씨 석방 이후의 대북 접근법을 가다듬는 일과 개각의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 인도적 차원에서 쌀과 비료를 지원하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관광, 이산가족 상봉을 다시 시작하자고 제의할 필요가 있다. 남과 북이 뭔가 주고받는 동안에는 북이 의도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는 남측 따돌리기는 불가능하게 된다.

이번 개각에서는 내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특정 지역과의 연대라는 정치공학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지역주의가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 원칙적인 인사를 해야 한다. 정략가(politician)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statesman)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법이다.

만일 이 대통령이 지역주의 청산과 남북 화해를 성공적으로 이뤄낸다면 진정한 ‘국민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재산의 대부분을 헌납하면서 사인(私人)으로서의 이해를 초월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역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결심하는 일이다. 지금 유럽연합(EU)의 유럽 통합작업이 가속화되고,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다. 오직 한반도에서만이 남북 간 대결 구도가 유지되고, 그나마 남쪽도 지역주의로 분열돼 있다. 이 대통령이 결단하기 위해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이하경 전략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