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북한탐험]16.공민왕릉의 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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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텃새 몇 마리가 나뭇가지 끝에 있었다.

공민왕릉으로 가는 길은 아늑자늑한 농촌의 정경 (情景) 그것이었다.

어디 하나 속도와 관련된 것이 없다.

'천리마운동' '속도전' 이란 북한의 오랜 독려구호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 곳의 삶은 속도 밖에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어제와 같다.

공민왕릉 입구에서 보았다.

능의 주산 봉명산은 둥글넓적하고 이에 앞선 안산 (案山) 아차봉은 좀 화가 난 듯했다.

고르고 고른 끝에 자리잡은 지극정성의 무덤자리였다.

고려왕조 34대 가운데서 공민왕은 31대인데 그때부터 지친 왕조는 기울어가는 판이었다.

제1대 태조 왕건에게는 마누라가 공식 29명이었고, 첫째 마누라 신혜왕후 류씨와 합장된 것이 현릉 (태조릉) 이었다.

그런데 태조를 잇는 2대 혜종은 신혜왕후가 아닌 장화왕후 오씨의 자식이었다.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인 장화왕후한테서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왕건이 피임을 꾀해 정액을 몸 밖에 배설했는데 왕후는 그것을 재빨리 제 몸속에 훑어넣어 임신했다 한다.

공민왕은 그가 사랑해마지 않던 노국공주의 무덤과 함께 쌍릉에 묻혔다.

노국공주는 원나라 위왕의 딸이다.

공민왕이 나라의 볼모로 간 베이징 (北京) 10년을 보내고 그 곳에서 맞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원나라가 왕으로 발령낸 공민왕 부부는 정작 본국에 돌아와서는 원나라에 대항하는 고려의 주권을 일으켰다.

때는 원.명 교체기였다.

나라의 중흥 그것이 왕의 절절한 숙제였다.

그의 마누라 노국공주가 몽골여자이기는 하지만 고려의 편에 서서 왕과 하나가 됐다.

공민왕의 생애는 노국공주와 노국공주 이후로 나뉘게 될 만큼 그녀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

그는 원나라 연호와 관제를 버리고 사람들의 호복 변발도 폐지했다.

1백년 동안의 쌍성총관부도 없앴다.

북방 영토를 되찾았다.

그런데 14년동안 다정불심 (多情佛心) 의 금실이던 노국공주가 죽자 왕은 인간적인 실의와 예술가적 절망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오직 불교의 무상관 (無常觀)에 파묻혔다.

공민왕릉 쌍릉 오른쪽이 노국공주의 것인데 그 무덤을 왕이 직접 설계하고 무덤자리를 골랐던 것이다.

그에게는 죽은 아내를 추모하는 일밖에 없었다.

태조와 같은 정략과 포부의 왕이 아니라 사랑의 왕이라는 그의 본색만이 남 겨졌다.

그의 그림 한 점이 서울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밖에는 남은 것이 별로 없지만 고려 회화를 대표할 만한 수준이라 한다.

죽은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은 다른 왕후들을 신하에게 능욕케 하는 기괴한 변태로까지 나타났고, 그런 변태를 아들 우왕도 이어받는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 9년이 되자 그도 죽는다.

생전의 뜻대로 그녀의 무덤 옆에 자신의 무덤을 써서 쌍릉의 석실 사이에 통로를 만들어 혼과 혼이 오고 갈 수 있게 했다.

그것이 유혼혈 (遊魂穴) 이다.

국력을 다해 만든 무덤이다.

일제시대의 도굴 흔적이 아직 그대로 있다.

무덤 석실의 벽화는 고구려 이래의 매장풍습 그대로 천장에는 해와 달, 삼태성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고 벽에는 12지신 그림도 너울거렸다.

능침의 규모는 능참봉 하나로는 벅찰 만했다.

석양머리인데 난데없는 남녀노소 한 떼가 정자각 가까이서 풍물을 놀면서 사물과 함께 덩실덩실 춤이 돌아가고 있었다.

부녀들은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였다.

나는 그들의 흥겨운 놀이 쪽으로 내려갔다.어떤 서론의 예절도 필요없이 당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물놀이의 힘이다.

그 징소리.꽹과리소리.장구소리에 파묻혀 끝내 나도 그들의 춤 속으로 들어갔고 그 사물놀이의 엉터리 상쇠노릇을 해봤다.

한참 땀범벅이 됐다.

그런 다음 그네들과 친해졌다.

"어디서 오셨나요?" "…. " 가만히 대꾸하기를 여기서 60리 되는 마을에서 산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농한기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먼 데까지 온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 얼굴들은 그저 몇 백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백성의 얼굴이었다.

그 곳 왕릉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 뒤 신돈이라는 극적인 개혁세력에 나라를 맡겼는데 이에 대한 반대쪽에는 왕사와 국사 16년간을 지내는 태고 (太古) 보우 (普愚) 의 치열한 양심이 있다.

보우는 오늘날 조계종 조종이다.

보우냐 보조 (普照) 냐로 갈라지는 조종논쟁은 그 둘을 시대적으로 아우르는 방편이 있어야겠다.

보우는 불교계의 타락을 규탄하며 절짓기도 반대했다.

한양천도로 새 국풍을 일으키자고 제안했다.

그는 왕에게 너무 종교적이지 말고 나라를 구하라고 충고했다.

5교3승 (五敎三乘) 이 다 석가모니의 오줌 찌꺼기이고, 부처니 조사니 하는 것이 모두 꿈속의 잠꼬대라고 외쳤다.

그런 보우와 함께 조선 후기 박지원 (朴趾源) 도 떠올랐다.

개성 30리 밖 연암골에서 홍국영의 증오를 피해 살고 있던 조선의 문호 (文豪) 를 어찌 잊을쏜가.

그의 호가 바로 이 언저리에서 얻어진 것이다.

연암골에서 과일나무를 심고 양어장도 만들었으나 그는 농사에 실패한 뒤 개성시내 친구 집에서 한동안 신세지기도 했다.

공민왕릉의 비문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한유, 비 머리 전자 (篆字) 는 권중화가 썼다.

그런데 이 공민왕 부부는 그들이 여기에 묻힌 뒤 조선 5백년 이래 무당집 신상 (神像) 이 돼 영생하고 있다.

서울 종묘는 조선 왕들의 위패를 모신 성리학 정치의 성소인데 그 한 군데에 공민왕 사당이 모셔져 있다.

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공민왕 노국공주 부부의 초상화는 그 당시의 대례복 정장차림이다.

또한 서울 마포에 공민왕 부부 신당이 있고 경북 안동에도 그런 사당이 있다.

원나라를 물리치고 강토를 찾은 것과 암살당한 왕의 비운을 위로하는 것이 왕신 (王神) 으로 모셔진 이유이리라. 거기에 최영장군도 하위신으로 모셔지니 고려의 두 사람이 신이 된 것이다.

개성시 관내 개풍군 해선리 정릉동에 죽은 아내의 정릉 (正陵) 을 짓고 그 옆에 자신의 현릉 (玄陵) 을 미리 지어놓고 죽은 공민왕의 무덤은 고려왕릉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다.

그 무덤에 대한 많은 비난을 넘어 그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현재로 만날 수 있다.

글=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김형수(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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