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 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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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광복절(光復節), 8·15는 올해로 64년째. 광복절은 ‘잃었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 광복절에 나라의 주권을 되찾았던 것일까? 작가 강준식이 1945년 8월15일 일어났던 일을 정밀 추적했다.

■ 관심분산작전

스페셜리포트 - 광복절 특집 - 해방 그날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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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5일 아침 여운형이 정무총감 관저를 찾아갔을 때 엔도는 소련군이 경성에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할 것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인 16일 낮 소련군이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소문이 서울 전역에 나돌았다.

엔도의 발언은 임시정부 요인 세 사람이 경성역에 도착할 것이라는 해적방송이나 동진공화국 선포를 알린 전단지와 무슨 연관이 있었던 것일까? 먼저 이 발언을 조사해 정리한 미국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총독(정무총감)은 미군이 코리아를 점령하지 않을 것이며, 점령은 순전히 소련군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건준(여운형)에 알려주었다.”(Part1, Chapter3 ‘The Koreans’ First Taste of Freedom’, , 1948)

여기에 자극받은 여운형은 회담 직후 계동집에 돌아왔을 때 간밤에 자기에게 접수하라 했던 방송국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동생 여운홍이 물어보았다. 그러자 여운형은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정이 달라졌다”고 말했던 것으로 여운홍은 회고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61년, 여운홍은 도쿄에 갔을 때 엔도를 만나 해방 당시 왜 소련군이 경성에 진주한다고 했는가를 물어보았더니 “도쿄 내무성에서 온 전보에 조선이 분단점령된다고 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고 한다.(여운홍, <몽양여운형>, 청하각, 서울, 1967)

그러나 총독부 관방총무과장 야마나 미키오는 그같은 내용이 내무성으로부터 조선총독부에 타전된 것은 8월22일이었다고 자신의 수기에 썼다.

“8월 22일, 내무차관으로부터 조선에 있어서의 군의 무장해제 담당구역은 북위 38도 이북은 소련군, 이남은 미군으로 할 것으로 본다는 예고전보를 받았으나….”(山名酒喜男 手記, <朝鮮總督府終政の記錄1>, 友邦協會, 도쿄, 1956)

그렇다면 왜 엔도는 전보도 받지 않은 8월15일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일까? 당초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넘기기로 한 것은 조선에 있던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총독부가 비행기를 동원하여 8월16일 공중에서 살포한 “조선동포여! 중대한 현단계에 있어 절대의 자중과 안정을 요청한다…”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명의의 삐라도 결국 조선인들에게 경거망동해 날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폭동을 일으킬지 모르는 조선인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소련군 경성 입성의 거짓말을 했으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 일제의 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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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일본의 항복 원고.. 1945년 9월9일,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 게양되는 미국의 성조기.
한마디로 병 주고 약 준 것이다. 일본인들은 8월15일 아침 치안권을 이양해 조선인의 폭동화에 대한 안전장치를 설치한 다음 8월15일 밤에는 임시정부 수뇌 3인이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해적방송을 내보내고, 8월16일 낮에는 다시 소련군 경성 입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같은 공작에 의해 10만여 명의 군중이 경성역으로 달려나가는 소동과 시위를 벌이자 일본 군경은 이를 조선인에 대한 강경책을 취하는 빌미로 삼았다.

“다수의 일본인은 생각지도 않은 다수 조선인의 대일본 시위운동에 격분해 이 같은 시위운동을 묵인하는 당국의 태도가 어딘가 느슨하다고 비난하는 소리를 높였지만, 생각하건대 이와 같이 가두에 운집하는 군중을 해산시키고 집에 있도록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강력한 군·관·헌(軍官憲) 공동의 권력행사를 필요로 하며….” (山名酒喜男 手記, <朝鮮總督府終政の記錄1>, 友邦協會, 도쿄, 1956)

더구나 16일 오후 3시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이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담화문을 발표했는데, 일본인들은 그 내용이 건준의 본래 목적인 치안을 넘어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불온한 방송이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건준의 재가를 받은 장권(張權)의 치안대 등이 활동하는 가운데 건준의 인준을 받지 않은 경위대·무위대 등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건준’ 이름으로 경찰서나 파출소를 습격해 일본인 경찰관을 쫓아내고 무기를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어떤 곳에서는 ‘○○경찰서’라는 간판 대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위대’로 바꾸어 달기도 했다.

또 해방 전부터 <매일신보>나 경성방송국 정도는 여운형이 접수할 생각을 갖고 접수위원들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이를 전해들은 각 언론기관의 조선인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경성일보> 동맹통신 등을 접수했으며, 또한 각 회사·공장·대상점·대학·전문학교 등 주요 기관시설에 대한 조선인들의 접수 요구가 빗발쳐 일본인들 가운데는 인도서류에 날인하고 인감이나 금고의 열쇠를 넘겨준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예전의 엄격한 질서의 기준이 상실되었다는 것에 격분한 일본인들은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군과 관과 헌병이 공동으로 치안권을 다시 확보한다는 결정을 보고 곧 반동적 행동에 들어갔는데 이 점에 대해 미군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17일 반동이 시작됐다. 조선인 경찰관들은 거의 일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당국은 전에 경찰이었으나 그 후 군에 징집된 일본인 3,000명을 소집했다. 따라서 질서회복 담당을 위해 소환된 자들의 다수는 경찰복이나 군복을 혼용하고 있었다.”(Part1, Chapter3 ‘The Japanese Retain Control’, , 1948)

일본 측 자료는 3,000명이 아니라 9,000명의 병사가 경찰관으로 전속돼 ‘특별경찰대’에 편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도쿄, 1964)

군·경 합동 강경책이 실시됨에 따라 거리는 다시 해방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조선인이 ‘해방’의 자유를 누린 것은 여운형이 수감자들을 석방시킨 8월16일 단 하루뿐이었다.

이미 17일부터 조선군관구 사령부는 “인심을 교란하고 적어도 치안을 해치는 일이 발생한다면 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경고문을 발포하고 탱크와 장갑차와 트럭 위에 기관총을 설치한 위장 장갑차를 동원해 도심에서 무력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반동정책의 연장선상에서 건준이 접수했던 <매일신보>·경성방송국 등의 언론기관도 일본군과 경찰에 의해 다시 빼앗겼다. 8월17일 밤, 엔도 정무총감은 나가사키 유조(長崎祐三) 보호관찰소장을 통해 건준위원장 여운형에게 “접수는 연합국의 몫이니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은 치안유지 협력에 국한하도록 자제해 달라”고 말했다.

한편 니시히로 경무국장은 18일 오후 3시 아사히마치(회현동)의 요정 ‘기쿠이(喜久井)’에서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을 만나 16일의 방송 내용은 궤도를 벗어났다고 지적하며 건준을 없애라고 종용했다. 그들의 시각에서 건준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프랑켄슈타인 괴물’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맛본 조선인들의 마음을 8·15 이전으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안재홍 이하 건준 간부들은 총독부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치안대를 그 산하에 발족시킨 건준은 신정부를 수립할 모체로서의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본인의 강력한 반동정책이 실시된 8월17일부터 조선인의 행동은 거리로 표출되지 못했다.

총칼을 든 일본 군경이 삼엄한 경계태세로 임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통치가 이어진 거리에서는 16일과 같은 군중시위나 만세소리나 태극기 같은 것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인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되찾은 것은 미군이 진주한 9월9일부터다. 그날 오후 4시35분 조선총독부 청사 마당에 오랫동안 게양됐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대신 성조기가 올라갔다.

흔히 8월15일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알려진 거리의 태극기 사진들은 예외 없이 9월9일 미군이 진주한 이후 촬영된 것이다. 자유가 주어졌던 8월16일 단 하루를 제외하면 항복조인식이 거행된 9월9일 오후 4시8분까지 총독부의 강압통치가 계속된 것인데도, 우리는 싸움에 진 것이 아니라 전쟁이 지겨워 스스로 싸움을 끝낸다는 일왕의 조서가 반포된 8월15일을 마치 ‘충량한 반도신민’처럼 우리의 주권을 되찾은 광복절로 높이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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