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격투기 신드롬] 해방감 맛보는 '막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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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7일 K-1 경기에서 중국의 장친춘(右)이 일본의 아케보노를 공격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1만300여 관중 틈에서 열광하고 있는 한 젊은 여성팬. [김상선 기자]

이종(異種) 격투기는 말 그대로 ‘서로 다른 격투기 중 어느 것이 더 센가’를 가리자며 시작됐다. 본격화된 건 1990년대 중반 미국과 일본에서다. 흥행이 되면서 ‘맨몸으로 누가 가장 강한가’를 가리는 이벤트로 발전했다. 복싱·레슬링·킥복싱·유도와 각종 무술이 총동원된다. 선 채로 주먹과 발만 사용하는 ‘K-1’에서,치고 차고 꺾고 넘어뜨린 뒤에도 항복할때까지 끝까지 공격하는 ‘프라이드’‘스피릿MC’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승부욕과 투쟁심을 대신 배설하고 승화시킬 수 있잖아요."

큰 현안이 있을 때 단골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른바 '사회원로그룹'의 한 사람 송월주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 그를 거기서 만난 건 뜻밖이었다. 이종격투기장에 송월주 스님이라….

제헌절 공휴일인 지난달 17일. 오후 3시부터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K-1 경기는 대성공이었다. 다른 세 스님과 함께 1등석에 앉은 송월주 스님은 "다른 경기와 다를 바 없다"면서 대리 만족 효과에 의미를 뒀다.

링 위에선 맨몸의 피 튀기는 사투. 링 주변은 울긋불긋 어지러운 조명 아래 관중의 환호. 1만300여 관객들 속엔 낯익은 유명 연예인도 많았다. 탤런트 허준호.김보성.이훈.이세창.소유진.김선아, 가수 엄정화.이혜영.싸이, 개그맨 남희석…. 대회 마케팅사인 MI스포츠 김명구 사장은 "연예인만도 50명쯤 왔다"고 알려줬다.

특별한 경기이긴 했다. 세계챔피언인 레미 보냐스키(네덜란드)와 스모 요코즈나 출신의 아케보노(일본) 등 외국 톱 클래스 선수들이 초청된 대회였다. VIP석 티켓이 110만원. 국내 스포츠 이벤트 사상 최고가다. 그런데 200장이 모두 팔렸다. 일본에서 120장을 사갔고, 국내에서 80장이 나갔다. 10억원에 육박하는 입장 수익에 주최 측도 놀랐다. "22만원짜리 티켓(1등석)도 안 팔릴 줄 알았는데…." 김 사장은 예상 밖의 대박에 감격했다.

'막싸움'으로 통하는 이종격투기가 대중을 붙잡고 있다. 한국에 상륙한 지 겨우 1년 남짓. 워낙 거칠어 처음부터 폭력성 논란이 계속됐다. 그러면서도 이미 화끈한 볼거리로 문화의 한 귀퉁이를 차고 앉았다.

더 진한 자극을 찾기 위함일까, 대리 만족의 쾌감일까, 아니면 그냥 스포츠 즐기기일까. 분명한 건 나이.직업.성별에 관계없이 꽤 많은 사람이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윤세창 교수는 '이종격투기 신드롬'이라고 표현한다.

"짜릿하잖아요. 컴퓨터를 켜면 먼저 이종격투기 동영상부터 봐요. 못 보면 친구들하고 얘기할 때 못 끼어요." 서울의 중3생 김모(15)군은 컴퓨터 앞에 앉으면 격투기 사이트부터 훑는다고 했다. 김군이 다니는 학교 교사 남모씨는 걱정한다. "예전엔 학생들이 단순한 주먹 싸움을 했지만 요즘엔 TV에서 본 고난도 기술을 사용해요. 그래서 크게 다치는 경우도 있지요. 심히 우려됩니다."

중장년층에게는 홍수환.유제두.김태식.박찬희로 이어지던 프로복싱 전성기의 향수를 일깨웠다. 서울 강남의 코엑스 오크우드호텔 지하엔 800석 규모의 이종격투기 퓨전 레스토랑이 성업 중이다. 경기도 성남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는 스테이지 중간 중간 격투기 경기를 한다. 춤 추다 싸움 구경을 하고, 싸움이 끝나면 다시 춤을 춘다.

"저렇게 잔인한 경기를 이렇게 편안히 구경하고 있어도 되는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파이터들의 주먹.발길질 한방 한방에 스트레스가 날아간다."(문학평론가 남진우)

근심거리 많은 2004년 대한민국의 한 사회상일까. 삼성서울병원 윤 교수는 "정형화된 규칙이 없는 싸움판을 보면서 질서.규정에 대한 반발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무의식 속의 공격본능이 그대로 표출된다"면서 "조만간 사회적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성호준.김종문 기자<karis@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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