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기업체 박사들 '찬밥신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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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L그룹은 지난해 6월 서울우면동에 환경연구소를 설립, 박사급 12명 등 총 27명의 연구원을 확보하고 본격적인 기술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최근 이를 없애기로 내부 방침을 굳혀 연구원들이 일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이유는 '투자여력이 없다' 는 것. 한 관계자는 "박사급 직원들을 관련 사업장에 분산 배치한다는 원칙이지만 계열사들이 이들을 활용할 만한 방안이 없다며 받기를 거부하고 있어 난감하다" 고 말했다.

기업체 박사들이 수난 시대다.

한때는 고급 인력으로 환영을 받았지만 심각한 불황 속에서 기업들이 연구개발 투자와 프로젝트를 대폭 줄이는가 하면 아예 연구소를 폐쇄해버리는 바람에 박사급 고급인력의 '설 곳' 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일반 직원보다 보수.직급이 상대적으로 높다 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우선 명예퇴직 대상' 에 포함되고 있다.

한국산업기술연합회에 따르면 기업 부설연구소의 박사급 연구원은 지난 10월말 현재 5천1백15명. 일반 직원의 박사학위 보유자를 포함하면 총 6천여명에 이르지만 최근 잇따른 사퇴.이직 등으로 급감하는 추세다.

◇ 퇴출당하는 박사들 = 쌍용그룹은 지난 83년부터 15년 가까이 투자해오던 첨단 신소재 연구를 중단해 박사급 연구원 20여명이 일자리를 잃은 채 뿔뿔이 흩어졌다.

동부도 2~3년전부터 추진하던 반도체 사업을 포기함으로써 박사 10여명이 마땅한 진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 대우중공업.금호정보통신.해태전자.벽산정보기술연구소 등 31개 민간연구소에서 올들어 박사를 포함한 총 6백32명의 연구원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대기업에서는 연구직 인력의 15%를 일괄 감축한다는 방침 아래 박사급 직원을 권고.희망퇴직시키고 있다.

또 연구위원들을 계약직.관리직으로 바꾸거나 지방사업장으로 재배치해 스스로 기업을 떠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D기업 인사담당 관계자는 "비용 절감이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에 박사들도 대상이 되고 있다" 며 "박사학위 소지자들에게는 높은 보수외에 특수수당이라는 명목 등으로 일반직원보다 매달 50만~1백만원씩 더 줘야 해 이들이 사내에서 눈총을 받고 있는게 사실" 이라고 말했다.

기업체를 떠나는 박사들은 재취업.벤처기업 설립을 모색하고 있지만 대부분 여의치 않아 실업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 퇴직한 朴모 (41) 박사는 "연구소의 폐쇄.통폐합으로 다른 사업부서에 배치받았으나 업무성격이 달라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며 "대학으로 가려해도 마땅한 자리가 없어 고등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고 말했다.

◇ 경쟁력 약화가 문제 = 산기협에 따르면 올해 주요기업 (2천1백49개) 의 연구개발 투자비 증가율이 사상 첫 마이너스 11.4%를 기록할 것으로 보여 당분간 '박사 수난시대' 가 지속될 전망이다.

더구나 기업들은 내년 예산에서 대부분 신규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연구 개발비를 20% 이상 크게 줄일 계획이다.

또 정부와 기업간 공동 프로젝트의 경우 부도 등으로 중단된 연구과제만 올들어 30여건에 이르고 있다.

모 대기업 박사급 연구원인 金모씨는 "IMF체제 이후 기업체 박사들의 신분 불안이 일반직원보다 더 심하다" 며 "이 때문에 연구 의욕까지 떨어져 밤늦게까지 자진해 연구하던 풍토가 사라지고 있다" 고 말했다.

산업연구원의 온기운 (溫基云) 박사는 "국제 경쟁력 유지를 위해서는 장기적인 연구개발 투자와 고급 인력의 체계적 관리가 시급한데 현실은 정반대라 걱정" 이라고 말했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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